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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May 16. 2020

퇴직 후 이모저모 - 2

실업급여

실업급여를 받으려면 반드시 들어야 하는 교육을 받으러 근처 고용보험센터의 교육장에 들어면서 에도 눈초점을 두지 않았다.

굳이 마주치고 싶은 것도 없었고, 나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안내문을 나눠주는 직원을 한 번 흘낏 바라 보고는 이내 눈을 돌렸다. 철밥통이라는 공무원들은 어떤 사람인지 부러워서였을 거다.

설마 나를 불쌍하게 보지나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괜히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고 그런 내가 부끄러웠다.


퇴직을 신청한 순간부터 시작된 가슴을 옥죄는 고통은 교육장에 들어선 순간 최고조에 달했다.

20대부터 60대, 혹은 그 이후의 나잇대에 있는 사람들까지, 그리고 깔끔한 차림새의 오피스걸에서부터 대체 무엇을 하다 퇴직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추레한 행색의 사람들까지 꽤나 많았다.

심지어 어울리지 않게 짙은 화장을 한, 마치 사창가의 포주로 보이는 듯한 나이 든 여자도 있었다.

그녀(할머니라고 해야겠다만)의 표정은 정부와 사회의 냉대에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 마지막 몇 집만 남은 요즘사창가를 그대로 보여 주는 듯했다.

그런 사람이 여기 와 있을 리는 없으니 작은 술집 같은 자영업을 하다가 폐업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사람과 같은 공간에 같은 목적으로 앉아 있다는 사실에 순간 서글픔과 분노 느다.

꽤 넓은 교육장의 중간에 앉은  앞 좌석들  꽉 들어찼고, 뒤에 서있지 말고 앞에 빈자리 있으니 와서 앉으라는 말로 미루어 뒤돌아 보지 않고도 백여 명은 족히 될 거다.

50줄에 들어선 듯한 여자 강사가 진행하는 교육을 아무 미동도 없이 듣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문득 아파트의 재활용 폐지를 집어서 짐차에 싣는 크레인 기계가 떠올랐다.

그 크레인에 달린 커다란 집게손이 우리들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어 트럭 적재함에 내동댕이칠 것 같았다.

그렇게 막 다뤄도 아무도 신경 쓸 것 같지 않을 사람들이 전국에 있는 수십 개의 고용보험센터를 채우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후회는 더 커져갔다.

"내가 미쳤지,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몇 년 남은 정년까지 잘 버틸 수 있었고 사회 분위기를 보 정년 연장될 수 있는데 대체 그 편한 직장과 그 월급을 놔두고 왜 나온 거지?"

"미친놈, 정신 나간 놈..."

끝없후회와 자책으로 금방이라도 책상을 뒤엎고 미친 듯 악다구니를 칠 듯한 충동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교육장에 들어서며 받은 취업희망카드라고 적힌 수첩의 어느 페이지엔 퇴직 전 급여가 적혀 있었는데 700만 원 가까운 숫자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더구나 그 금액은 임금피크로 10%가 줄어든 급여였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속은 점점 더 아파왔다.

앞자리의 어느 젊은 여자 수첩이 그녀의 어깨너머로 보였다.

뒷자리까지는 보지 못했지만 앞자리는 1로 시작하는 걸로 미루어 최저임금만 받았겠다는 추측을 했다. 

'그래도 내가 좋은 직장에 있었다'는 뿌듯함은 이내 '근데 왜 나온 거지'라는 후회로 바뀌었다.

퇴직 여러 해 전부터 시작된 이명과 어지러움이 겹치면서 금방이라도 혼절할 듯했다.

차라리 혼절이라도 했으면, 아니 그냥 이 자리가 삶의 마지막 장소였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왜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거지?"

역할이 사라진 잉여 인간들이 모 교육장의 분위기 견디기 힘들었다.

싫어도 만들어지는 자책과 후회는 퇴직 후 한 달 만에 재시장 어느 생선구이집 환기구에 수십 년 쌓여 온 기름때만큼이나 내 마음 구석구석에 덕지덕지 붙어 버렸다.

어느 순간 갈 곳이 없어져 버린 상실감과, 그로 인한 경제적 상황 악화에 대한 두려움 또한 자책에 얹혀 있었다.


"이것으로 교육을 마치..." 강사의 마무리 멘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일어섰다.

남들이 채 일어서기 전에 고개를 푹 숙이며 교육장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대신 계단으로 내려와서 밖으로 나왔다.

최저 시급, 사창가의 포주, 잉여인간의 무리에서 도망쳤다.

난 다르다고 소리치며 그 무리 속에 있는 생경한 나로부터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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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거다.

로빈슨 크루소나 월든 호숫가의 헨리 소로가 아닌 이상,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체가 아니기에 없는 것들을 채우려 다른 이들과 복잡하게 얽힌 타인과의 실타래를 풀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이 필요했다.

퇴직은 그러한 것들을 빼앗아 갔다.

퇴직이 처음이라 어떤 상황이 올지 몰랐다.

순식간에 바스러져서 사라질 목돈의 미끼에 넘어가 수십 년간 나를 지켜준 갑옷과 방패를 팽개쳤다.

한 마디로 건방을 떤 거였다.

깨닫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갈 곳이 없어진 걸 알아채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다.

정기적인 수입이 없어진 건 한 달이면 알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혜택이나 후광이 없어진 걸 알아차리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게 없어졌다.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적당히 갑의 위치에 있기도 하고 때로는 을이 되기도 하는,

하루 8시간 내내 힘들게 구르지 않아도 되고 쉬기 싫어도 쉬어야 하는,

저녁을 얻어먹기도 하고 회사 돈으로 생색내며 사기도 하는,

그러면서도 때때로 힘든 체하며 여기저기 투정도 부리는,

그럴듯하게 폼나는 '일'이 없어졌다.

그것도 잠시가 아니라 상당히 오래.

아니, 어쩌면 영원히.

그렇게 나는 명예로부터 퇴직했다.

그리고 수십 년 꼬박꼬박 내왔던 고용보험료 총액보다 훨씬 모자란 실업급여를 구걸하는 잉여인간이 되었다.

그 노릇도 몇 개월 후면 끝이 난다.

이 또한 시한부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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