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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May 09. 2020

퇴직 후 이모저모 - 1

명예퇴직...?

명예퇴직... 대체 명예라는 단어는 왜 거기에 붙어 있는 걸까?


뭔가 그럴듯해서, 이름이 예사롭지 않아서 덥석 물었다.

그런데 물고 나서야 명예가 왜 거기에 붙어 있는지 알았다.


12월에 접어들어 명예퇴직 신청에 관한 공지가 발표되었다.

강제가 아니라 자유로운 각자의 의사에 의해 신청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회사는 퇴직 목표 인원과 대상자 명단을 정했을 것이고, 이번 인원 감축을 계획대로 마무리짓기 위한 다양한 작전이 준비되어 있을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50 중반을 넘긴 직원들이 남아 있으면 험한 꼴 당할 거라는 정보도 핵심 인물을 통해 흘러나왔다.

대개가 그렇듯 그러한 소문은 여러 입을 거치며 과장되고 증폭되었다.

서울의 한쪽 끝에 위치한 회사를 그 반대쪽 끝으로 옮긴다는 계획까지 흘러나왔다.(물론 퇴직신청이 마감된 후, 그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절대 새어 나오지 않을 정보였지만 친절하게도 구체적인 일정이나 이전할 건물 이름까지 덧붙여졌다.

평소에도 작은 일을 크게 확대 해석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앞당겨 걱정하는 나는 스스로 깊은 고민의 함정으로 기어 들어갔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직원 개개인에게 미리 산정해서 보내 준 명예퇴직 보상금은 절묘한 액수였다.

포기하자니 아까운, 그러나 받고 퇴직하자니 모자란 금액.

누군가에겐 고민스러운 액수가 아니겠지만 내게는 치열한 갈등을 일으키는 안타까운 액수였다.

명예퇴직 신청 마감까지 주어진 시간은 2주 남짓.

선택지는 딱 둘이었다.

퇴직하느냐, 마느냐.

아주 단순했다.

그러나 단순함은 역설적으로 복잡함을 만들어 냈다.

결코 짧지 않은 마감까지의 시간은 갈등과 고통의 연속이었고 기한이 다가올수록 고민은 극심해졌다.

급기야 구토 증세까지 만들어내며 나는 깊은 함정으로 빠져 들었다.

마치 좌초된 유조선에서 흘러나온 원유를 온몸에 흠뻑 뒤집어쓴 채 눈동자로만 어찌할까를 물어보는 바다새와도 같았다.

평소에도 가성비에 목을 매며 심각한 선택 장애를 가진 나로선 인생 최대의 장애물을 만난 것이다.

장고 끝에 악수라던가? 마지막 날 몇 시간을 남겨 놓고 신청서를 메일로 보냈다.


그렇게 30년의 직장 생활은 끝이 났다.

편하든 빡세든 시간만 지나면 돈이 생기던 시절과는 인연이 끝났다.

실제 능력보다 많은 돈을 받으면서도 투덜대던 호사는 시절 좋은 옛이야기가 되었다.

이리저리 계산해 본 퇴직금과 명퇴 보상금의 합계액은 은행 부채와 크기가 거의 일치했다.

그 사실은 8개월의 실업급여가 끝나면 거미줄처럼 가늘게나마 이어가던 내 가치도 함께 끝이라는 사실이었다.

명퇴 신청서를 보내고 나서야 2주일간의 갈등과 고민이 왜 그리도 힘들었는지 명확해졌다.


잘못 선택한 것이었다.

결정하기까지의 고민은 차라리 배부른 투정이었다.

그때의 번민은 어쩌면 오만이고 건방이었다.

섬뜩한 전율이 앞으로 겪게 될 고뇌의 전주곡으로 온몸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2주간의 고민 중 주변 사람들에게 어찌할까를 물었다.

답은 두 갈래였다.

부채를 청산할 좋은 기회고 밖에 나오면 할 일은 많다며 이 참에 새로운 일을 해보라거나,

달리 준비한 게 없다면 비에 젖어 길바닥에 찰싹 붙어 있는 나뭇잎처럼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앞의 조언은 주로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후자는 거의 직장인들의 조언이었다.

역시 그랬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경험이나 기준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상황을 가장 잘 아는 나 자신도 선택하지 못하는 걸 타인에게 물어보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참고가 될까 하여 물어본 거였다.

아니다. 참고가 될까 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때 이미 난 답을 내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퇴직하는 쪽으로 저울추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내 선택에 대한 타인의 동의와 지지를 구하고 있었던 거다.

말이 동의와 지지를 구하는 거지, 실상은 내 선택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타인의 조언을 핑계로 책임회피를 하고 싶은 거였는지 모른다.

그건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수십 년을 루틴 하게 살아온 대개의 직장인다운 태도였다.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한다고 했지만 회사의 업종과 부서의 업무라는 영역에 한정된 혁신이고 창조였다.

옆을 보지 못하도록 눈가리개를 착용하고 정해진 트랙을 따라 달리기 위해서만 혁신과 창조를 발휘하는 경주마와 같았다.

그조차 아주 가끔 의식할 뿐 대개의 시간은 그런 의식도 하지 않고 지내온 게 분명하다.

그러다 트랙이 사라져 버렸다.

눈가리개도 떼어 버렸다.

둘러본 주변은 목책도 없는 황량한 벌판이고 길이라고 생각되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어디로든 달려야 할 것 같은데 출발 신호도, 기수의 호령도, 옆구리에 와서 박히는 박차의 통증도 없다.

눈뜨면 출근하고 출근하면 주어지는 과업이 사라졌다.

아무런 지시 없이 일을 내가 찾아야 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그건 취미가 아닌 생업으로서의 일이란 말이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서두에 말했던 명예라는 단어가 왜 거기에 붙어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퇴직이 명예로운 게 아니라, 명예로부터 퇴직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젠 명예 따위와는 거리가 먼 버둥거림만이 있을 듯하다.

나를 뭐라 소개해야 할지 모르는 정체성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온라인 회원 가입 신청서의 직업란에 '-'로 난감함을 드러내는 존재가 된 것이다.

제로가 된 부채 덕에 신용도는 최고점이지만 정작 최고로 평가해 준 은행과는 예금만 가능한 비대칭적 거래 관계가 된 것이다.

이게 명예로부터 퇴직한 명예퇴직의 현실이다.

그렇지 않은 능력자도 있겠지만 그는 그일 뿐, 아직은 나는 나다.

명예스럽다고 이름 지어준 퇴직과 비교 조차 송구스러운, 일방적인 구조 조정으로 인한 황당한 실직자도 있겠지만 역시 그는 그, 나는 나다.


앞으로의 길은 어떤 길이고

앞으로의 나는 어떤 사람이고

앞으로의 삶은 어떨지 궁금하다.

영화 '퍼시픽 림'의 예거를 벗어던지고 맨 몸으로 우주 괴물들과 맞서게 되었다.

이제 다시 사회 초년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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