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고 200만 원이 안 되는 불로소득(사실 불로소득은 아니다. 형식적이지만 구직활동을 해야 주는 돈이니 나름 근로소득일 수도...ㅎ)에 의지한 채 집에서 멍하니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처음에는 조급한 마음에 뭐라도 한답시고 여기저기 쏘다녔지만 점차 성과가 없다 보니 그마저도 시들해져서 나가는 일이 꽤나 쑥스러워졌다.
하긴 성과가 없는 게 당연했다.
폼나는 일이 떠먹기 좋게 준비되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내 눈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고, 될 듯싶은 일은 이미 남들이 다 손대고 있었으며, 누가 귀띔해 주는 사업거리는 해야 할 일이 태산이고 가야 할 길이 너무 멀어 보였다.
아직 기름기가 덜 빠진 거였다.
게다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따박따박 나와주는 실업급여가 있으니, 조바심에 동동거리는 머리와는 달리 몸뚱이는 폐차장 더미에 던져진 상태였다.
출근하는 아내를 배웅하고 혼자 아침을 대충 먹고 나면 바로 무기력함에 젖어든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거실 바닥에 앉아 티브이를 켜고 0번에서 60번 채널 정도까지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이내 무료해졌다.
눈 앞에는 TV가 켜져 있고 앉은자리 옆엔 신문이 펼쳐져 있지만 그것들은 자기 할 일만 하는 개별적인 존재들에 불과했다.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보면 머릿속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대체 이 머리라는 녀석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종속물 중 하나인지, 아니면 내가 그 녀석의 일부인지 알 수 없다.
때로는 내 소유이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내 소유가 아닌, 그 역시 개별 존재자다.
내가 지시하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 녀석은 수시로 지난날의 기억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용케도 50여 년의 삶에서 유독 부끄러운 기억들만을 소환해낸다.
내 불편함을 덜고자, 혹은 작은 이익이라도 챙기고자 잔머리를 써왔던 치졸한 행적들을 끄집어내어 본모습을 까발려 놓는다.
이쯤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어깨를 움츠리며 기억을 털어내려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버린다.
그래 봐야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려진 기억은 어느샌가 다시 그 장면으로 와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내게만 보이는 기억임에도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때의 시공간에 함께 있던 이들에게 안 그런 척하던 내 행동의 속내가 다 보였을 게 분명하다.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에 온몸이 쪼그라들고 인상이 찌푸려지면서 몸을 떨게 된다.
대체 지난날은 왜 모두가 부끄러운 것들 뿐인지 모를 일이고, 대체 왜 한참 뒤에야 알게 되는 걸까.
철없던 시절의 생각과 행동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려 해도 그때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종종 행하고 있는 걸 보면 그게 내 태생인 거다.
그렇게 부르지 않은 기억들은 무방비로 놓인 힘없는 나를 지금에서야 잔인하게 찔러온다.
퇴직 후의 후회와 불안이 나 혼자만의 고통인 양하는 투정을 아내는 다 받아 주었다.
그녀 역시 퇴직 이후에 대한 불안함은 나 이상이었음에도 별달리 내색하지 않았다.
후회와 조급함의 내 버둥거림을 보며 속으로만 고통을 나눠 가졌다.
그러다 내가 잠깐이라도 밝아지기라도 하면 그녀 역시 그랬다.
그게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잠깐의 편안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아내는 늘 내게 회재 불우(懷才不遇 : 재주를 품고 있지만 때를 못 만났다)를 말하며 위로한다.
그러나 아내가 말하는 그 재주란 놈 또한 내 것이 아닌지 당최 찾지 못하겠다.
그 재주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때'라는 게 만나야 하는 건지, 아니면 찾아야 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 : 혼자의 힘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주변의 환경이 잘 맞아야 성공할 수 있다. 출전 - 청나라 포송령의 '요재지이')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 물정 모르던 건방진 지난날에는 우스개 소리로 알았다.
그런데 우스개 소리가 아니었다.
그건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이나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과 같이 성공의 길이고 인생의 요체 일지 모른다.
이렇게 '내 탓하기'에 지쳐 남 탓을 하며 또 하루를 보낸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그나마 30%라고 하는 내 재주를 찾아야겠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몸뚱이인데 아끼고 고이 모셔서 대체 뭐에 쓸 건가.
어차피 머릿속의 생각이란 놈도 내 것이 아닌데 몸이라도 다 써야 덜 억울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