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퇴사 후,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갑작스럽게 끝난 25년, 그 이후의 기록

by 지혜로운 사자

25년이었다.


프랑스에 본사를 둔 글로벌 바이오테크 기업. 생물공학 석사과정을 마친 20대 후반에 입사해 50대 초반이 될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사원으로 시작해 학술, 마케팅, 영업 등 여러 직무를 거쳐 사업부 국내 책임자가 되기까지, 나는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렸다. 누구보다 오래 일했고 매 순간 진심이었다. 태생적으로 워크홀릭의 경향이 있었던 나는 사실 그 시간을 꽤 좋아했다. 힘들었지만 보람 있었고, 출근하는 게 좋았다. 월요병이 뭔지도 모르고 살던 날들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나를 돌볼 틈이 없었다. 10년 넘게 사업부 책임자로 살면서 실적 압박과 조직의 리더로서의 책임감을 안고, 수없이 잠 못 드는 밤을 보냈다. 그 사이 코로나 상황 등 다양한 위기 상황을 겪었고 그때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행복하고 명예로운 순간들도 있었고 아쉽고 속상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매일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


갑작스럽게.


퇴사가 정해진 뒤 아끼던 팀장이 찾아왔다. 퇴사 파티를 하려는데 어떤 분위기가 좋겠냐고 물었다. 의미 있고 차분하게? 아니면 재미있고 즐겁게? 나는 주저 없이 후자를 골랐다.


파티는 1부와 2부로 나뉘었다. 아담한 호텔 연회장에서 공연이 이어졌고, 누군가는 거문고를, 누군가는 첼로를 켰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별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읽었다. 진정한 환송회였다.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스크린이 켜졌다.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해외 동료들의 영상 편지였다. 웃으면서 이별하기 위해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버티던 나는 결국 무너졌다. 진한 눈물이 흘렀다.


마지막 며칠도 그렇게 지나갔다.


오래 다닌 만큼 이별해야 할 사람도 많았다. 편지나 선물을 들고 내 방에 찾아와서 한참을 앉아 있다 가는 직원들이 있었고, 차마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서 서로를 계속 피하다가 전화로 이별을 마주한 직원들도 있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눈물을 삼키는 먹먹함이 느껴졌다. 가슴이 아팠다.


협력업체 대표님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죄송한 마음을 전했고, 나의 부재를 알면 서운해할 만한 해외의 동료들에게는 단체 메일을 보냈다. 수신자만 100명이 넘었다. 그들 중 일부에게서 답장이 왔고, 나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다시 답장을 썼다.


눈만 마주치면 눈물이 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없는 시간에 짐을 정리하며 마주치는 횟수를 줄였다. 담담하게 보내려고 아침마다 다짐했지만, 실상 매 순간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마음속에서 수없이 생각했던 순간이었음에도 그 긴 스토리의 에필로그를 작성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때의 감정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실적 압박과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잠 못 드는 밤들. 그 무거운 책임감에서 벗어난다는 안도감은 진짜였다. 동시에 25년간 동고동락한 동료들, 그리고 정든 후배들과 헤어지는 게 서운했다.


나를 오래 알아온 후배들은 나를 걱정했고, 어떤 사람들은 확신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오해했다. 일을 쉬면 우울증이 올까봐, 분명 곧 다른 곳으로 이직하리라고, 아니 이미 다른 곳을 정해두었다고.


정작 나는—나도 몰랐다.


퇴사 후 며칠간은 여전히 회사생활의 연장이었다. 정리할 것들이 많았다. 회사 자료를 정리한 후부터는 집안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감정을 먼저 처리하는 대신 손을 먼저 움직이는 것. 그게 내 방식이었다. 서랍을 열고 오래된 물건을 꺼내고 읽지 않을 책을 골라냈다. 손이 분주한 동안 머릿속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비우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천천히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이 글은 그 이후의 기록이다. 집을 비우고 이사를 하고, 다시 학생이 되고, 무대에 서고, 창업을 준비하는 지금까지. 결말을 모른 채 쓰는 글이다. 아직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솔직하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로. 비슷한 길 위에 있는 당신에게, 이 기록이 조금이나마 닿기를 바란다.


다음 회에는 퇴사 직후 시작한 집 정리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