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비우는 것으로 시작했다

버리는 게 아니라, 그 시절을 보내는 것

by 지혜로운 사자

퇴사 후 처음 한 일은 여행도, 낮잠도 아니었다.


집을 정리했다.


특별히 계획한 건 아니었다. 그냥 손이 먼저 움직였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자다가 그대로 눈을 못 떠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상태였다. 회사에 온 마음과 에너지를 다 쏟아붓고 남은 게 없었다. 동일한 일을 다시 찾아볼 의욕도 없었고, 내가 뭘 잘할 수 있는지, 뭘 하고 싶은지 조차 모르겠었다.


그래서 그냥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남편을 챙기고, 집 앞의 나지막한 산을 한 바퀴 돌고 돌아왔다. 그리고 오디오북을 틀었다. 미뤄두었던 책들, 바빠서 읽지 못했던 책들을 귀로 들으면서 집 안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감정을 먼저 처리하는 대신 손을 먼저 움직이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행동이었다.


거의 한 달을 그렇게 두문불출했다.


주방부터 시작했다. 서랍을 열었더니 소쿠리며 일회용 젓가락은 왜 그리 많은지. 냉동실에는 친정 엄마가 언제 주셨는지도 가물가물한 도토리묵 가루와 삶은 밤이 몇 년 치나 묵혀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면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소스들이 즐비했다. 모두 꺼내고, 바닥부터 닦고, 필요한 것들만 다시 채웠다.


도토리묵 가루를 버릴 때 잠깐 멈칫했다. 다리가 아파 고생하시는 엄마가 도토리를 주워 손수 갈아서 챙겨 주신 것들이었다. 그런데 묵을 쑤어본 적이 없었다. 바빠서. 언제나 바빠서. 결국 손을 쓰지 못한 채 냉동실 안에서 오랜 시간이 흘렀다.


퇴사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만들어봤다. 엄마가 가르쳐 준 방법으로 도토리 묵을 만들면서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만들기 쉬운 걸 시도조차 못 했던 시간들이 기막혔다.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가 내미는 정성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양이 너무 많은 데다 일부는 꿉꿉한 냄새까지 났다. 그나마 쓸 수 있는 건 만들어 먹고, 나머지는 버렸다. 미안함이 남았다. 버린 건 도토리묵 가루였지만, 엄마의 마음까지 버린 건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장롱 차례였다. 옷들이 쏟아졌다. 유행이 지난 옷들, 사놓고 못 입는 옷들, 작아서 못 입는 아이들 옷들. "언젠가 입겠지"라는 말로 수년을 버텨온 것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것들이 나왔다.


회사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만들어 주었던, 매년 한두 개씩 늘어나 어느새 장롱 한 칸을 채운 회사 로고 박힌 단체 티셔츠, 점퍼, 가방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이걸 이렇게 많이 갖고 있었나.


옷들을 하나씩 꺼내면서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쓸모가 다한 옷들을 정리하면서, 쓸모가 다했다고 나를 정리했던 회사를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싶었다. 버릴 건 버리고, 흘려보낼 건 흘려보내는 것. 옷이나 사람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으로 마지막에 받았던 여름 티셔츠 하나를 제외하고 그것들도 조용히 비웠다.


책장도 정리했다. 한 번 읽고 다시 펼치지 않은 책들. 사놓고 읽지 못한 책들. 읽었던 기억은 나는데 내용은 하나도 남지 않은 책들. 쓸 만한 책들은 주변에 나눠주고, 중고서점에 팔기도 했다. 나머지는 과감히 버렸다.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손으로는 책을 비우는 시간이 묘하게 좋았다.


마침내 그렇게 즐겼다. 읽고, 버리고, 읽고, 버리고.


그런데 끝내 손이 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아이들 물건들이었다. 상장, 일기, 엄마 아빠한테 쓴 편지들, 심지어 반성문까지. 한 장을 열면 그 자리에서 몇 시간이 사라졌다. 회사 생활 중에 직원들에게 받은 편지와 카드, 긴 세월이 담긴 동료들과 찍었던 사진들, 그리고 장기근속 상패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들은 버리지 않기로 했다. 대신 정리하기로 했다.


박스를 꺼냈다. 직원들의 편지와 사진들 그리고 장기근속 상패는 박스 하나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 박스는 나의 긴 직장생활의 타임캡슐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들 이름으로 각각 박스를 하나씩 만들었다. 상장, 편지, 일기, 반성문, 사진. 언젠가 아이들이 결혼할 때 건네줄 생각이다. 그때 이 박스를 열면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 궁금하다.


책장 한구석에서 남편이 오래전에 만들어준 '100일 편지' 책을 발견했다. 20년 넘게 책장에 꽂혀 있었다. 100일 동안 매일 편지를 써서 보내면 책을 만들어주는 출판사 이벤트에 지원해서 세상에 하나뿐인 책을 만들어 준 그 사람. 오랜만에 한 장을 펼쳤다. 그때의 남편이, 그때의 나를 이렇게 바라봤구나.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달이 지났다. 공간이 비워지자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물건을 정리하는 일은 과거를 정리하는 일과 닮아 있었다. 전부 버릴 수도, 전부 안고 갈 수도 없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보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 그 과정이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에너지가 소모되면서 마음속의 묵은 체증도 내려갔다.


그래서였을까. 정리가 끝난 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비로소, 다음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회에는 한 달의 정리 끝에 찾아온 예상치 못한 결심 — 이사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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