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향 대신 노을을 선택했다
한 달 넘게 집을 정리하고 나니 공간이 넓어 보였다. 가지런히 정리된 책장 속의 책들처럼 마음도 조금 가지런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짐은 비웠지만, 집 자체는 여전히 낡아 있었다.
빛바랜 벽지, 켜켜이 쌓인 묵은 먼지, 광택을 잃은 원목 마루. 큰 가구들을 옮기지 않으면 손댈 수 없는 곳들이 눈에 밟혔다. 처음에는 짐을 이삿짐센터에 맡겨두고 집을 수리한 뒤 다시 들어올까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들도, 딸도 이미 기숙사에 있었다. 학기 중에는 나와 남편 둘만 사는 집이었다. 이 동네, 이 학군 근처에서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발이 저절로 부동산 쪽으로 향했다.
이 집에 이사 올 때 계약했던 부동산이었다. 11년 만이었다. 매일 오가는 길목에 있어 얼굴은 익숙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간 건 오랜만이었다. 사장님은 나를 기억하셨다. 동네 주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기억하고, 수십 년의 신뢰로 관계를 이어온 분이었다. 큰 목적 없이 시장 상황이나 알아볼까 하고 들어갔는데,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집을 내놓고 있었다.
사장님은 우리 집을 직접 방문해 살펴보고 적정 매도 가격을 제안했다. 한동안 부동산 시장이 침체된 터라 집을 내놓는다고 해서 바로 팔릴지는 의문이었다. 집을 사고파는 일은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가장 큰 거래 중 하나라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장님은 우리 집을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집으로 소개했다. 10년 넘게 아이들이 자라고,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멋지게 성장해 온 그 이야기가 양념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월요일에 집을 내놓자마자 매일 두세 팀이 집을 보러 왔고, 나흘 만에 우리 집의 다음 주인이 결정되었다.
우리 집을 산 건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딸과 아들이 있는 젊은 부부였다. 남편이 해외근무 중이라 친정어머니와 집을 보러 온 딸은 남편의 휴가 때까지 매매를 미루고 싶어 했다. 그런데 부동산 투자에 안목이 밝으셨던 친정어머니는 우리 집을 너무도 맘에 들어하셨다. 초등학교와 지하철역이 가깝고, 앞에 작은 동산과 천변이 있고, 무엇보다 당신의 취미인 파크골프장이 가까이 있다는 것에 흡족해하시는 눈치였다. 망설이는 따님 대신 밤늦은 시간에 계약금을 보내는 결단력으로 우리 집을 선점하신 친정어머니 덕분에 젊은 아기 엄마는 인생의 과감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
며칠 후 귀국한 남편에게 집을 보여주기 위해 간식을 사 들고 다시 방문한 그녀는 남편에게 이 집이 얼마나 좋은지 열심히 설명했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나와 남편이 했던 이야기를 야무지게 기억하고 있었고 거기에 본인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가 덧붙여졌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 집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이겠다 싶었다. 그녀의 남편이 이 집을 마음에 들어 할 수 있도록 우리 부부도 함께 거들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분들은 좋은 기운이 있는 집을 좋은 가격에 사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잔금을 치르는 날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할 만큼이나.
나도 기뻤다. 우리 가족이 10년 넘게 살아온 집, 아이들의 웃음과 눈물과 성장이 담긴 집을 아무에게나 넘기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도 좋은 가족에게 기쁜 마음으로 건넬 수 있었다.
분명 콘크리트 덩어리인 아파트인데, 집을 사고파는 과정에는 정서적인 교환이 일어난다는 걸 그때 새삼 알게 됐다.
새로 이사할 집도 바로 다음 날 결정했다.
서향집이었다.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남향이 아니었음에도 발걸음이 멈췄다. 오후의 햇살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 자락이 마음을 간지럽혔다. 창밖으로는 작은 소나무 동산이 보이고, 그 너머로 노을빛으로 물드는 서쪽 하늘이 펼쳐졌다. 마음을 빼앗기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침 집주인은 재미교포분이셨다. 그리운 가족과 손자 손녀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정리하고 싶어 하셨다. 짐은 단출했고, 덕분에 공간이 넓어 보였다. 잘 정돈된 깔끔한 느낌이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그 집주인도 집을 보러 온 여러 사람들 중에 나를 처음 봤을 때 이 사람이 다음 주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집도 사람도, 인연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그렇게 퇴사하고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살던 집을 떠났다. 새 집으로 바로 들어간 건 아니었다. 짐은 이삿짐센터에 맡겨두고, 약 한 달간 집수리를 먼저 했다. 벽지를 바꾸고, 마루를 손보고, 공간을 새로 다듬었다. 그 한 달은 묘한 시간이었다. 짐도 없고, 정해진 공간도 없이, 말 그대로 붕 떠 있는 시간.
그리고 드디어 새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처음 열던 날, 낯선 공간이 반짝였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냄새가 났다. 두렵기도 했고, 이상하게 설레기도 했다.
나를 둘러싼 물리적인 공간이 모두 바뀌었다. 이제 내 안을 바꿀 차례였다.
다음 회에는 퇴사 후 달라진 인간관계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