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는 일을 잃은 사건이 아니었다.

6개월이 지나자 진짜 관계가 보였다

by 지혜로운 사자

회사를 그만두던 날, 나는 몰랐다.


인간관계도 함께 정리된다는 것을.


업무상 통화가 필요했던 사람들과의 연락은 하루아침에 뚝 끊겼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겪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서운했다. 간혹 나의 소식을 모르고 전화해 온 업계 지인이나 고객들은 퇴사 사실을 알게 되자 당황하며 어떤 말을 이어가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구구절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고, 오래 다녔으니 이제 새로운 도전을 할 타이밍이라고, 잠깐 쉬면서 생각해 볼 계획이라고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면 수화기 저쪽에서는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인연이 되면 또 보자고 말하고 끊었다.


어떤 이들은 내게서 그간 받은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뭔가 숨기고 있는 건 아닌지 알아내고 싶어 했다. 어떤 이들은 조심스럽게 불러내어 위로하고 싶어 했고, 어떤 이들은 그동안 너무 고생했으니 이제 그만 쉬라고 했다. 어떤 이들은 이미 이룬 게 많으니 더 욕심낼 거 없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아직 창창하고 그간의 경험이 아까우니 얼른 취업하라고 했다.


사회에서 만난 분들과는 그래도 건조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더 복잡했던 건 가족과 친구들이었다.


남편은 워크홀릭이었던 내가 우울해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아이들은 각자 제 일이 바빠 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엄마가 집에 있는 게 본인들을 위해 나쁘지 않으니 환영하는 눈치였다. 부모님은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그동안 해오던 지원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하시면서도 그동안 고생한 게 안쓰럽고 좀 쉬었으면 하셨다. 동생들은 늘 든든하던 집안의 맏딸이 인생 첫 긴 휴식을 마음껏 누렸으면 하면서도, 다음 길을 잘 찾아갈지 마음을 놓지 못했다.


너무 지나친 관심은 부담스러웠고, 무관심과 무심함은 서운했다.


정년이 보장된 직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은퇴까지 갈 길이 멀다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 안정된 울타리를 스스로 벗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정년이 보장되지 않은 직장에서 나보다 먼저 퇴사를 경험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가 얼른 취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사 울타리를 나오면 얼마나 추운지 그리고 쉬는 기간이 길어지면 재취업이 얼마나 불가능해지는지를, 그 경험을 생생하게 전해줬다.


아마도 각자의 바쁜 일상 속에서 내 상황을 깊이 들여다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친구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나를 바라봤다.


부러워하거나, 안쓰러워하거나.


퇴사하면서 회사 후배들에게 선언한 게 있었다.


"내가 먼저 전화하지는 않을 테니, 보고 싶으면 먼저 연락해."


지금까지 가능한 한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퇴사 후 6개월쯤 지나자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의 인적 네트워크에서 남는 사람과 떠나보내야 할 사람들의 경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상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평생 갈 것 같았던 관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관계가 오히려 이어졌다. 베푼 만큼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고, 받은 만큼 관계가 이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이해득실을 넘어, 그냥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응원하는 마음, 그것이었다. 일방적인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결국 관계는 쌍방이 함께 마음을 내어야만 이어진다는 걸.


퇴사와 함께 재편된 인간관계는 내게 선명한 것들을 보여줬다.


누가 진심으로 나를 존중했는지. 누가 나를 신뢰했는지. 그리고 나의 앞날을 응원하는지.


물론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필요할 때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도 있다. 몇 년간 연락이 끊어져도 언제나 마음속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존재를 다시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퇴사는 일을 잃은 사건이 아니었다. 나에게 진짜 중요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게 된 시간이었다. 소중한 소수에게 더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된 것. 돌이켜보면, 참 다행한 일이다.



다음 회에는 새 집에서 MBA를 시작한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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