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에 미루어둔 숙제를 시작했다.
나에게는 무언가 마음먹고 시작하기 전에 주변을 먼저 청소하는 오래된 습관이 있었다.
시험기간에는 책상 위를 먼저 정리하고 연필을 깎고 필요한 자료들을 한쪽에 가지런히 쌓아둔 후에야 공부를 시작했고, 해외 출장을 가기 전에는 집안 대청소를 해야만 출장길을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었다. 어떨 때는 이게 징크스인지 강박인지 헷갈리기도 했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무언가를 시작하는 의식이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무언가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흔히들 말하는 인생 2막을 시작하려고 하니 평소 습관처럼 물리적 공간인 집을 먼저 정리하고 싶었던 것 같다.
퇴사 후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이사 일정이 결정되고 나서부터 손은 분주했고 몸은 고단했다. 가져가지 못할 짐들을 버리고 나누고 정리하는 서너 달이었다. 몸이 고되니 마음속 슬픔은 조금씩 물러나 앉았다. 그렇지만 물리적인 공간을 정리하면서도 그 이후에 무엇을 할지를 정하는 건 어려웠다. 시험이나 출장은 정해진 일정과 목적과 내용이 비교적 명확한 일들이었지만 새로운 인생의 도전이나 인생 2막의 설계는 전혀 명확하지 않았다. 물리적 공간은 정리될수록 가지런해졌지만, 인생의 방향과 나 자신에 대한 고민은 오히려 더 복잡하게 엉켜갔다. 매일 냉탕 온탕을 번갈아 들어가는 이질적인 느낌을 해결해야 했다.
은둔생활을 끝내고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의 지혜를 빌려야 할 때였다. 주로 그동안 나를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던 선배들과 업계 지인들을 만나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많은 분들이 각자의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나의 고민에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그분들의 마음이 고마웠고 그동안 인생을 헛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떤 분들은 재취업에 대해, 어떤 분들은 노후 준비에 대해 그리고 어떤 분들은 창업에 대해 본인들의 생각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잘할 거라는 용기도 주었다.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며 비로소 마음속 감옥에서 탈출한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무언가 다시 시작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가족들이 알면 속상해할 일이지만 그 무렵 나는 매사에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생각했다. 그래야 그다음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What if?, 만약에?"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예를 들면 " 내가 만약 내일 세상을 떠나는 일이 생긴다면?", " 내가 만약 재취업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같은 질문들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내 인생이 영원하지 않고 정해진 경로가 없다면... "이라는 부정적으로 보이는 질문을 할수록 할 수 있는 건 오늘을 충실히 살고 내가 나의 길을 만드는 것뿐이라는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감정을 걷어내니 새로운 걸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러던 중 평소에 많이 의지했던 대학 선배와 오랜 인연의 헤드헌터 분을 만났고 두 분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내게 MBA 진학을 추천했다.
사실 MBA는 내 인생의 오래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서른을 조금 넘긴 때부터 해보고 싶은 공부였다. 다국적 회사에서 근무를 하다 보니 본사의 높은 위치에 있는 젊고 똑똑한 직원들 중 이공계 학위와 MBA 학위가 동시에 있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공계 출신인 내가 경영학 기초도 없이 바로 MBA를 시작하는 건 무리였다. 기왕 할 거면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MBA는 좀 더 긴 호흡의 목표로 삼기로 하고 기본기를 공부하기 위해 방송통신대학 경영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리고 둘째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와중에 3년에 걸쳐 경영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육아와 회사 생활이 바빠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건 엄두가 나지 않는 시간들이 흘렀다. 마흔 무렵, 사회적으로 한창 기세를 올릴 때 다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현실은 늘 꿈보다 엄혹했다. 두 자녀의 교육비는 해마다 불어났고, 주택 융자금 상환과 양가 부모님의 생활비 지원이라는 책임감은 나를 단단히 붙들어 매었다.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지금은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MBA에서 배울 내용들을 현장에서 이미 치열하게 배우고 경험하는 중"이라는 핑계는 꽤 설득력 있는 방어기제가 되어주었다. 그러다 코로나 팬데믹이 덮치고 수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되자, 나는 아예 그 목표를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캠퍼스의 낭만도, 동료들과의 치열한 토론도 없는 모니터 속 공부는 내가 꿈꾸던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아이들은 어느덧 자라 모두 대학생이 되었고, 나에게는 선물 같은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50대의 내가 이제 와서 공부를 해서 대체 어디에 쓸 것이며, 졸업 후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목적지 없는 항해를 시작하는 것이 맞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어갔다. 새벽 두세 시에 눈이 떠지면 천장을 바라보며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지금 내가 하려는 게 도전인지, 도피인지. 몇 주간의 치열한 고민 끝에 나는 마침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로 했다.
'어디에 쓸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과정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앞으로 무얼 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해답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왕 넘어진 김에 조금 길게 쉬어가는 셈 치자.'
문제는 경제적 상황이었다. 이사로 인해 목돈이 크게 나가는 상황에서 나의 학업은 가계 경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한 번 불붙은 갈망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안 될 이유"가 아닌 "할 방법"을 찾기로 했다.
가장 먼저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남편은 뜻밖에도 내 말을 끝까지 듣더니 웃으며 나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해 주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이제는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해보라는 따뜻한 격려였다. 아이들에게도 정식으로 허락을 구했다. "너희가 모두 대학에 갔고 성인이 되었으니, 엄마도 다시 공부를 시작해보고 싶은데 괜찮겠니?" 다행히도 아이들은 나의 늦깎이 도전을 자랑스러워하며 지지해 주었다.
물론 모두가 응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늦은 나이에 그 공부가 무슨 실질적인 도움이 되겠느냐며 나의 도전을 안쓰러워하셨다.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이라며 끝맺지 못한 걱정을 내비치셨다. 친구들 역시 의아해했다. "이제 좀 쉬어도 되는데, 남들 은퇴할 나이에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가성비나 가심비를 논한다면 시작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타인의 시선이나 잣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타인의 요구를 채우느라 나 자신을 돌볼 틈이 없었다. 이제는 내 안의 깊은 욕구를 들여다보고, 나라는 사람의 본질에 집중할 때였다.
먼저 졸업한 선배의 정성 어린 추천서를 받아 MBA 과정에 원서를 제출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장에 들어섰고, 얼마 후 입학 허가 통지서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학기가 시작되고 3주 만에 이사를 해야 하는 강행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집 인테리어 마감 문제로 약 한 달간 '집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고, 일주일 단위로 숙소를 옮겨 다니던 와중에 과제도 하고 시험준비도 해야 했다.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설레었다.
만약 예전처럼 회사를 다니면서 이사와 학업을 동시에 해내야 했다면 쉽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그때 '자유인'이었고, 벅찬 일정도 기꺼이 감내할 여유가 있었다. 50대의 문턱에서 나는 그렇게 다시 학생이 되었다. 낡은 짐을 버리고 새집으로 거처를 옮기듯, 나라는 사람의 내면도 낡은 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지식과 경험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나의 삶은 이전과는 다른 궤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삶의 터전과 환경을 바꾸어 가는 와중에 공부를 시작했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다른 노력들도 시작했다.
다음 글에서는 무너진 몸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뻣뻣하게 굳은 50대의 몸으로 발레바(bar) 앞에 서게 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