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instant,
단 하나의 장소, 단 하루의 시간,
단 하나의 사건은
연극을 구성하고 완성한다. 브왈로
시간과 장소에 영원성을 불어 넣는 힘. 이게 바로 그림이 갖는 힘이 아닐 까 싶다. 네덜란드의 장르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Jan Vermeer 그림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에서 북닥거리는 사람들 틈에 군계일학 처럼 내 눈에 들어온 그림은 푸른 옷을 입고 편지를 읽는 여인이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전시된 램브란트의 야경에 비하면 아주 작은 사이즈의 그림이다. 그래도 페르메이르 특유의 푸르른 빛깔이 저 멀리서도 별처럼 반짝였다.
그림에 다가서자 화면 가득 팽팽한 정적속에서 편지에 열중하는 그녀의 눈,코,입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빛과 장면의 조화에 탁월했던 화가의 재능에 한번 놀라고, 그림이 가져다 주는 이야기의 힘에 또 한번 놀랐다.
그녀는 지금 편지 어느 대목의 문장을 읽고 있는 것일까. 주먹을 꽉 쥐는 것은 평소의 습관 일까. 해상 무역의 꽃을 피우던 그 시대 바다 건너에서 온 그 남자의 손 편지 일까. 그녀의 실루엣으로 짐작해 보건데 그녀는 지금 임산부의 몸인 건 아닐까.
백 마디의 말보다 때로는 소박한 필치의 '편지 한 장'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 올 때가 있다. 마음을 보여주는 일은 결코 창피한 일이 아닌데 왜 우리는 뒤돌아 서서 한번 씩 후회하게 되는 건지. 난 이 대목에서 문득 알랭 드 보통의 글이 생각났다. 시공을 초월해 그림이 건네주는 이야기의 힘을 빌어 여러가지 기분좋은 상념에 빠져본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랑 안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많은 종교에서 우리를 볼 수 있는 신이라는 개념이 중심을 차지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누가 나를 본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신이나 짝이라면 더욱 좋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의 역사를 수도 없이 말해 주었는데도 우리가 결혼을 몇 번 했는지, 자식이 몇 명인지, 우리 이름이 브래드인지 빌인지, 카트리나인지 캐서린인지 자꾸 잊어버리는 [우리도 그들에 대해서 똑같이 잊어버린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마음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새겨두고 있는 사람의 품에서, 시야에서 사라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발견한다는 것은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닐까?<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