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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 Kim Mar 16. 2022

알고 보면 쓸데 '있는' 그림이야기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렘브란트

독창적인 예술가가 새롭게 나타날 때마다 우리의 세계는 무한대로 증가하며, 수 세기 전에 없어진 하나의 행성에서부터 발산한 빛이 현재의 지구까지 도달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렘브란트, 혹은 베르메르라는 이름의 행성에서 나온 빛은 그 근원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우리를 감싸고 있다.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중에서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에서 렘브란트의 야경(좌), 예언자 안나(우)

바로크의 거장, 렘브란트의 그림은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게 하는 힘이 있다.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 메인 홀 중앙에 왕처럼 전시된 <야경, 1642년, 캔버스에 유채,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을 보면, 압도적인 빛과 카리스마에 할 말을 잃고 만다.


어린 예수가 성전에 왔을 때 그가 메시아임을 한눈에 알아본 <예언자 안나, 1631년, 패널에 유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를 그린 작은 그림마저도 그 시대, 그 순간, 그 그림 속으로 빠지게 하는 마법이 있으니, 그를 가히 네덜란드 국보급 화가를 넘어, 지구 상의 위대한 화가 중에 한 명이라고 칭하지 않을 수 없다.

렘브란트, 야경, 1642년, 캔버스에 유채,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프란시스 고야가 자신의 스승을 '자연, 벨라스케스 그리고 렘브란트'라고 칭한 걸 보면 그가 후대 화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지금보다 훨씬 순수했던 20대에는 렘브란트 그림을 참 많이도 좋아했고, 그의 그림을 열심히 탐독했다. 자정 12시 비행기를 타 시차 부적응에도 불구하고 암스테르담 렘브란트의 집에 제일 먼저 들른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네덜란드, 헤이그 중앙역의 <몬드리안의 디자인들>

풍차의 나라, 바람의 나라답게 네덜란드는 12월에도, 5월에도 매서운 바람이 한결같이 불었다. 암스테르담 렘브란트 생가에서 인상적인 시간을 보내고 곧바로 헤이그로 넘어왔다. 헤이그에서는 할 일이 참 많다. 몬드리안의 디자인이 돋보이는 헤이그의 중앙역에 내려 이 도시의 세련됨과 마주쳐야 하고, 고종의 헤이그 특사 이야기가 보관되어 있는 이준 박물관도 가야 한다. 또 크리스천인 나는 이준 기념교회에서 주일예배도 한번 드려야 맞다. 무엇보다 델프트에서 열리는 토요 마켓에서 일상을 즐기며 네덜란드 특산 치즈도 먹고, 인생 갓 생선 튀김인 키블링도 먹어야 했다.

헤이그 마우리츠 하이스 왕립 미술관

17세의 네덜란드.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해상 무역의 꽃을 이루던 그 시대.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은 이 작은 나라가 얼마나 번영을 누렸었는지 끝없는 역사적 유물들을 뽐낸다. 12세기 후반에 어민들이 암 스테르 강에 제방을 쌓고 정착하여 시작된 도시가 1602년 동인도 무역회사를 차리고, 동양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호황기를 지닌 네덜란드의 황금시대. 무역과 장사로 '본 투비 귀족'이 아닌 신흥 귀족이 창궐하던 그 시대가 난 늘 흥미롭다. 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새로운 시민계급이 성장하고 그림의 수요자도 귀족이 아닌 일반 시민들로 확대되기 시작하던 그 시대가 말이다. 나라도 흥할 때가 있듯 한 사람의 인생도 그러하겠지. 인생의 황금기같은...


좌우지간 이 시점에 네덜란드에서는 장르화가 탄생한다. 특정 부르주아 계층에 의한 주문 제작이 아니라,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려 시장에 내놓으면 이발사든, 여염집 주인이든 누구나가 그림을 사서 집안 구석구석 걸어 놓을 수 있었다. 오늘의 그림으로 소개하고 싶은 '집단 초상화'도 풍경화 풍속화같은 장르화중 하나였는데, 당시에는 상업 자본가들의 부와 지위의 상징인 이런 장르화가 꽤나 핫한 문화 이슈로 자리매김했다.

렘브란트,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년, 캔버스에 유채, 헤이그 마우리츠 하이스 왕립 미술관 소장


당시 무명 화가였던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 외과의사 길드 조합에서 집단 초상화를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니콜라스 울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헤이그 마우이츠 하위스 왕립미술관>는 무명이었던 화가 렘브란트를 명실공히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작품이다. 렘브란트 역시 이 그림이 훗날 자신의 예술인생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부학 수업을 듣고 있는 일곱 명 각각의 시선과 표정이 너무나 생생하고 진지해서 그림 앞에서 한참이나 서성였다.


사실 이 방 넘어엔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델프트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뜻밖의 그림과 조우해서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어떤 마력이 있다. 볼 때마다 신비하다. 빛의 화가라고 불리는 렘브란트는 사실 그대로의 장면을 묘사하면서도 명암의 대조를 이뤄 항상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 그림의 어두운 배경 뒤에는 외과의사 조합의 규정이 게시되어 있고, 시체의 발 밑에는 해부학 개론 책이 펼쳐져 있다. 해부학 그림을 그려야 했던 화가는 아마도 인간 해부에 관한 책을 계속해서 탐독했을지도 모른다. 화면의 가운데 누워있는 시신은 범죄자 아드리안인데, 노상강도였던 그는 처형된 후 의과대학의 해부용으로 기증되었다.


해부학 실습 강의를 듣고 있는 일곱 명의 인물들의 시선이 중앙으로 집중되면서 마치 관람자로 하여금 해부학 실습의 관객으로 있는 착각이 들게 만든다. 당시 해부학 실습은 개복을 한 후, 복부에서 손과 발을 해부하는 것이 절차였지만 렘브란트는 인물들의 표정과 시선에 집중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오른쪽 검은 모자를 쓰고 있는 인물은 외과의사 니콜라스 툴프 교수다. 당시 툴프 교수는 시장을 역임한 그 동네의 핵인싸였다. 그는 매년 해부학 수업을 공개했고, 지성인을 꿈꾸는 돈 많은 관객들이 이 진풍경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돌프 박사를 비롯한 나머지 일곱 명의 그림 속 인물 모두 암스테르담 외과의사의 조합원들이었다. 이 그림은 한동안 외과의사 조합의 사무실에  기념사진처럼 전시해 두었다고 한다.

렘브란트,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년, 캔버스에 유채, 헤이그 마우리츠 하이스 왕립 미술관 소장


핏기 하나 없는 이 싸늘한 시신 앞에서 그림 속 인물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피해갈 수 없는 종착역이 죽음이라면, 삶도 사랑도 그 모든 것이 유한하다는 지혜를 안다면, 우리는 어제보다 더 치열하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모멘토모리! Momento mori!
당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있는 시신과 해부학 강의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인물의 표정이 한 공간에서 묘하게 대립되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동시대를 뛰어넘어 위대한 화가로 불릴 수 있는 어느 예술가의 뛰어난 안목이 여기에 있다. 푸르스트의 말마따나 렘브란트라는 행성에서 나온 빛이 은근하고 강하게 전시관의 방을 가득 메워 내 안으로 들어왔다. 당신이 없다면 이미 의미가 없는 당신의 인생. 당신의 모든 경험의 주인은 당신 자신이다. 그러니까 순간순간 진짜 인생을 살아야지! 이 생에 관해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Life is so good!

렘브란트,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년, 캔버스에 유채, 헤이그 마우리츠 하이스 왕립 미술관 소장

이야기가 있는 그림

화가: 렘브란트,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제작 연도 및 형식 : 1632년, 캔버스에 유채

크기 : 169.5cm×216.5cm

소장 :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 하이스 왕립 미술관

암스테르담, 벗과 함께
어떤 장소이건 그곳을 풍요롭게 하는 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한 장소가 풍요해지려면 앞서 다녀간 사람들이
남겨둔 감정들이 그곳에
서려 있어야 한다.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해지는
장소가 있는가 하면, 왠지 서먹하고
불편한 장소도 있다.

어떤 장소는 꿈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어주고, 또 어떤 장소는 우주를 일깨운다.
그런 장소의 벽들이 오랜 세월 동안 보고
들어온 수많은 사연들을 나지막이
속삭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이야기에는 때때로
어떤 매듭이 있어서, 그 매듭을 잡아당기면••••
온 우주가 열리며 잠깐 동안 놀라운
비밀을 드러내 준다 By 장 자크 로니에,
영혼의 기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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