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고개를 숙인 산, 몬세라트!
가우디의 도시, 바쁜 바르셀로나에서 며칠 보내니,
이제 근교 여행이 슬슬 궁금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은 대도시를 맛본 후에 고즈넉한 소도시의 매력을 느껴보는 것!
꼬리에 꼬리를 무는 팔색조 여행을 즐긴다.
이른 아침 일행들과 차를 타고 한 시간쯤 가니, 차창 밖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입이 딱! 벌어진다.
거대한 산인데 아제 본 가우디 건축 같고, 자연인데도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대형 조형물 같았다. 가공하지 않은 조각품처럼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성당처럼 신성한.
이 산의 이름은 몬세라트(Montserrat)다.
몬세라트(Montserrat)
스페인어로 톱니처럼 생긴 산이라는 뜻인데,
정말로 이름값을 이토록 충실히 하는 풍경이 또 있을까 싶다. 거대한 석회암 덩어리들이 구름 위로 솟아올라, 무언가를 기다리듯 고요하게 서 있었다. 수천 년 세월 동안 침식의 결과겠지만, “이건, 자연이 만든 성소다.”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몬세라트 꼭대기에는 천 년 넘게 수도사들이 머물러온 수도원, Santa Maria de Montserrat Abbey가 자리하고 있다. 성당 안에는 검은 마리아상, La Moreneta가 있다.
누군가는 그 앞에서 오래 기도했고,
누군가는 말없이 손을 얹은 채 서 있었다.
고요가 감정을 눌러주는 그 평화로운 순간이 참 좋았다.
정오가 되자, 하늘을 가로지르듯 청명한 음이 울려 퍼졌다.
소년합창단, Escolania de Montserrat의 공연 시간이 다가왔다. 그들의 목소리는 천사처럼 맑았고, 설명할 수 없이 순순수했다. 소리는 가벼운데, 마음은 진중하게 출렁였다.
그 명랑한 기분으로 미술관에 들렀다. 카라바조, 엘 그레코, 달리, 피카소. 의외로 진짜 작품들도 있었다. 가장 오래된 신앙과 가장 현대적인 감각이, 한 벽 안에서 조용히 공존하고 있었다. 종교적 정적 위에 예술의 여운이 내려앉는 그 공기는 말해 모해. 한 박자 쉬어가는 이 소중한 모먼트라니! 몬세라트가 선사해주는 특별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산을 오르기로 했다. 꼭대기 전망대까지의 오르막.
생각보다 가팔랐고, 숨이 찼다.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고,
신발은 흙먼지를 품었고, 구불구불 돌아가는 그 길은 어디까지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산마루 너머로 십자가 하나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 바위와 하늘 사이에 선 십자가.
그건 어떤 경고도, 메시지도 아니었다.
그저, 여기까지 잘 왔어!라고 말해주는 신의 선물같았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장관.
능선이 구름에 젖고, 도시가 저 멀리 흐릿하게 깔리고,
바람은 구불구불했던 내 숨결을 데려다 한 마디로 정리해 줬다. “이 길, 인생이랑 참 많이 닮았네.”
힘들게 올랐고, 종종 뒤를 돌아봤고,
어딘가에 도착했을 때야 비로소
지나온 모든 구비가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그날의 산책은 단순한 트레킹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반추하는 작은 순례길이었다.
내려오는 길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배우 박중훈 씨는
이 여행의 대미를 위한 출연자 같았다.^^
익숙한 미소와 매너, “오늘은 참, 예고 없는 장면이 많다.” 세렌디피티란 말은 그래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우연히 뜻밖의 행운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그 어원은 꽤 낭만적이다. 옛 페르시아 동화 ‘세렌디프의 세 왕자들’. 이 왕자들은 아무것도 찾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뭔가를 ‘발견’한다.
그래서 생겨난 단어, 세렌디피! 계획도 없었고, 기대도 없었는데—운명처럼 딱 맞는 퍼즐 한 조각을 줍게 되는 순간.
생각해보면, 삶이란 의도된 계획보다 그런 우연들로 더 아름다워진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 우연을 한 번 믿어볼까.
세렌디프의 왕자처럼^^
삶도 그렇지만 여행은 결국 taste의 문제다.
어떤 풍경을 아름답다 느끼는지,
어떤 공기가 마음에 스며드는지,
어떤 침묵이 나를 울리는지를 따라
사람의 결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번화한 거리에서,
누군가는 숨어 있는 해변에서,
그날, 그 정오의 시간에
나는 몬세라트에서 특별한 모먼트를 맘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