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런던의 봄

런던, 미술관 산책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에서 보낸 오후

by Sarah Kim
정원으로 열리는 미술관의 창
빅토리아 앤 앨버트(V&A) 뮤지엄에서 보낸 오후


런던의 오후는 예측할 수 없다. 햇살과 비, 구름과 바람이 한 시간 안에 조용히 뒤엉켜 춤춘다. 그날, 나는 그 다층적인 날씨처럼 겹겹의 이야기로 구성된 공간,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V&A)에 갔다. 런던에서 Must See 중 상위권에 드는 장소다!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의 커다란 입구를 지나 고요한 예술의 품 안으로 들어섰다. 이 미술관은 단순한 미술관이 아니다. 세월과 예술, 장식과 철학이 정교하게 중첩된 시간의 궁전이다. 유리 천장 아래 쏟아지는 채광은 마치 미술관 자체가 예술 작품처럼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내 발길은 자연스럽게 윌리엄 모리스의 직물 디자인과 라파엘 전파의 거대한 드로잉들 앞으로 향했다.


그림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해 말해주는 것 같은 작품들. 장식이 곧 정신이 된다는 걸, 이곳에서 배운다. 윌리엄 모리스의 장식예술. 식물의 곡선이 기하학적으로 반복되는 그의 문양은 단지 미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몸짓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야 한다.


영국인이 사랑한 화가 윌리엄 터너


영국은 흐린 날이 많은 나라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가 바뀌고, 햇살은 금방 사라지고, 비와 안개가 그림자를 드리운다. 하지만 그런 영국을 누구보다 아름답게 그려낸 화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J.M.W. Turner). 영국인들이 ‘빛과 감정의 연금술사’라 부르는 그의 그림도 보았다. 터너는 대상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그 순간의 빛, 기후, 정서를 담아내는 데 천재적이었다. 특히 런던의 템즈강이나 항구, 바다의 폭풍을 담은 그림들에서는 마치 구름과 물결이 혼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터너의 그림은 선명하지 않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감정처럼, 기억처럼, 그리움은 언제나 안개 속에 빛나는 법이니까!


The Cast Courts 복제의 진실성


다음 발걸음을 옮긴 곳은 V&A의 명물 중 하나인 캐스트 코트(Cast Courts) 19세기 영국이 전 세계의 예술유산을 연구하고 보존하기 위해 실물 크기로 복제해 온 조각과 건축물의 모사관이다.


그곳엔 트라야누스 개선문, 다비드 조각상의 실물 크기 석고본, 로렌초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그리고 성당 내부 구조물까지 숨 막힐 정도의 정교함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놀라운 건, 이 복제품들이 ‘진짜가 아닌 것’이 아니라, 진짜를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진심이라는 것. 예술이란 결국, 원형을 향한 인간의 그리움이라는 문장을 되뇌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나는 긴 여행을 떠났다.
낡은 외투를 입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무라카미 하루키, 먼북소리 중에서


존 마제스키 가든, 예술이 숨 쉬는 틈


긴 감상의 끝엔, 미술관 중심에 자리한 중정, 존 마제스키 가든(John Madejski Garden)에서의 오후의 휴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런더너들의 행복한 이 공간. 고요한 물소리, 아치형 건축물 아래서 균형 있게 뻗은 나무들, 그리고 잔잔히 퍼지는 커피 향. 나는 한쪽 창가 자리에 앉아 방금 전 내 마음을 어루만진 조각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 공간은 단지 전시가 아니라 삶의 쉼표로서 존재하는 것 같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이 아닌, 얼마나 간절하게 ‘무언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는가. 복제품 앞에서도 원본을 보듯 감동했고, 햇살 속 커피 한 잔에서, 삶이 가득 채워짐이 느껴졌다.



예술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식탁 위에도 머문다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전시실 못지않게 반드시 들르게 되는 장소가 있다. 바로 그 안에 숨겨진 “세계 최초의 박물관 카페”, 정식 명칭으로는 Refreshment Rooms. 이 카페는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공간이 아니다. 예술의 여운을 음미하며 잠시 숨을 고르는 무대, 전시와 감상 사이를 잇는 예술적 쉼표다.

예술이 당신의 테이블에 앉는다면


1856년, 당시 박물관장이었던 헨리 콜(Henry Cole)은 산업혁명으로 각박해진 런던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환경에서의 대중적인 식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파했다. 그 결과, 세계에서 처음으로 박물관 내부에 식당을 설계했다. 최고의 예술가들이 디자인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곳이 단순한 ‘카페’로 불릴 수 없는 이유다.

내 앞의 커피 잔 위에도, 앉아 있던 의자의 나뭇결에도, 지나가는 빛과 창가의 정적 속에도, 예술은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V&A의 카페는 그런 곳이었다. 감상을 마치고 카페에 도착했을 땐 몸이 아니라, 내 마음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천장의 둥그런 조명을 품안으로 끌어안고 싶다. 예술작품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확! 끌어안아 보는 것이라고 느낀 하루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런던, 도시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