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서고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
런던, 대영박물관을 걷다
시간의 서고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
히드로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런던의 공기는 달랐다. 부드럽지만 어딘가 묵직했고, 오래된 벽돌과 비 냄새가 섞인 특유의 질감이 있었다. 파리가 예술을 속삭이는 도시라면, 런던은 시간을 차곡차곡 기록해온 도시 같았다. 거리의 색감, 흐린 회색 하늘, 여유롭게 달리는 빨간 버스까지—모든 풍경이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시차때문인지, 짐을 풀자마자 곧바로 쓰러져 꿀잠을 잤다. 어슴푸레한 새벽, 이 도시의 시작을 깨우는 소리에 눈이 일찍 떠졌다. 런던의 첫 일정은 대영박물관이었다. 설레이는 도시탐색을 하다가, 러셀 스퀘어 역에서 내렸다. 다행히 세찬 비가 잠시 그쳤다 말다를 반복했다. 오늘은 이 매력가득한 도시의 ‘시간을 여행하는 날’이라고 스스로 되내였다.
대영박물관 앞에서
시간의 마법에 걸리는 기적
문을 열면, 세기가 바뀐다. 도서관 같고, 궁전 같고, 학교 같기도 한 대영박물관의 정면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이곳은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라, 인류가 세계를 해석해온 방식과 기억을 모아둔 거대한 ‘사유의 창고’였다.
그러나 그 웅장함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솔직한 질문을 떨칠 수 없다.
“이렇게까지 많은 유물들이 왜,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실제로 대영박물관의 유물 대부분은 과거 제국주의 시절 영국이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것들이고, 지금도 그 문제는 뜨거운 감자처럼 논쟁거리다. 이 박물관의 아름다움과 가치는 그 빛과 그림자를 함께 안고 있다. 하지만 또 한편, 나는 다른 진실도 느끼게 되었다. 이 거대한 공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자이언트 뮤지엄들은 입장료가 무료다. 어떤 배경, 어떤 국적이든 누구나 와서 인류 문명을 마주할 수 있다. 어린 학생들, 여행자, 런던 시민, 예술가, 연구자… 모두가 동등하게 세계의 시간을 공유한다. 그 속에서 어떤 보물은 빼앗긴 역사임이 분명하지만, 문화의 향유는 누군가의 삶을 더 넓혀주는 일이기도 하니까.
유리 지붕 아래로 쏟아지는 푸른 빛 햇살, 대리석 벽면 사이로 쉼 없이 흐르는 사람들의 발걸음— 이 모든 것이 마치 지구의 시간을 압축해 놓은 거대한 도감 같았다. 수천 년의 문명이 서로의 어깨에 얹히듯 놓여 있고, 각 대륙에서 건너온 유산들은 ‘과거’가 아니라 내 앞에서 숨 쉬는 ‘현재’처럼 느껴졌다. 여기서는 역사도 여행자처럼, 여기저기 방을 옮겨 다니며 나를 찾아온다. 그날도 나는 그렇게, 시간이 켜켜이 쌓인 장소 속을 천천히 걸었다.
사자의 얼굴에는 왜 시간이 보일까
그레이트 코트의 거대한 스핑크스 라이온
입구를 지나면 가장 먼저 시선이 멈추는 건 묵직한 기운을 풍기는 거대한 사자 석상이다. 몸은 닳아 있는데 얼굴만은 묘하게 살아 있다. 마치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지?” 하고
말을 건네며 수수께끼를 낼 것 처럼 보인다.
시간에 닳았지만 기품은 사라지지 않은 얼굴, 그 사자는 마치 오랜 인생을 통과한 누군가의 내면을 보는 듯한 신비로움을 풍겼다. 나는 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여행자의 호흡으로 숨을 골랐다. 아, 너무 좋타!
라파 누이의 모아이,
사람은 떠나도, 시선은 남는다!
이스터섬의 모아이 앞에서는 말보다 침묵이 먼저 찾아온다. 생각보다 크고, 생각보다 조용하며, 생각보다 훨씬 많은 말을 건네는 존재였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그 검은 눈동자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인간을 관찰해온것처럼 깊이를 품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카메라 셔터를 바쁘게 누른다. 나 역시도 그랬지만 사진보다 ‘그 시선’을 먼저 눈에 담고 싶었다. 모아이는 늘 같은 표정을 유지하지만, 우리 각자는 전혀 다른 감정을 읽어내니까.
그리스 조각들 앞에서
아름다움은 결국, 균형의 이야기다
대영박물관의 그리스 조각들은 빛 아래에서 유난히 생생하다. 피부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한 하얀 대리석, 부드러움과 단단함이 함께 흐르는 옷의 주름, 그 앞에 서면 나는 늘 아름다움과 시간의 균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 조각들은 힘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강인한 기운을 품고 있다. 마치 세월을 견뎌낸 사람의 얼굴처럼.
나도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강요하지 않는 힘을 품은 사람으로.
세계의 무덤들
죽음은 멈춤이 아니라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
특히 게벨레인 맨(Gebelein Man) 앞에서 시간은 완전히 멈춘 듯했다. 4,000년 가까이 모래 속에 잠들어 있던 그 몸은 여전히 손발의 형태를 유지한 채 우리 앞에서 누워 있었다.
유리관 너머의 그 모습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이집트인들은 죽음을 ‘이동’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이 남자는 지금도 여행자의 자세로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죽음도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여행일 수 있겠구나.
런던에서 만난 한국
낯선 도시에서 만나는 가장 익숙한 풍경
전시장 한편에서 갑자기 한옥의 기둥이 시선을 붙잡았다. 처마선, 나무 결, 온돌방의 창호— 다른 나라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의 모습은 기억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결국, 여행의 의미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고,
낯선 것을 다시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 순간, 멀리 이억만리 떠나온 내 마음도 조금은 더 넓고 단단해졌으리라!
건물은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더 웅장했다.
파리의 오르세가 빛을 전시한다면, 런던의 대영박물관은 시간을 전시한다고나 할까!
런던의 심볼, 빨간 이층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 — 런던은 오늘도 이야기 중이다. 비오는 날 차 창밖으로 흐르는 빗줄기, 플랫폼에 서 있는 부산스러움이 하나의 문장처럼 이어졌다.
런던은 지적이고 아주 매혹적인 도시다. 무뚝뚝한 듯하지만 깊고, 담백한 듯하지만 오래 남는다. 그런 도시를 걷다 지쳐 동네 로컬 피쉬앤 칩스 펍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맥주 한잔에 여행이 주는 노곤한 피로가 스르르 녹는다. 완벽하진 않아도, 완전한 하루! 오늘은 그런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