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미술관에서
시카고에서 만난 수집가의 초상
아직 별빛이 남아 있는 새벽, 우리는 디트로이트에서 일찍 길을 나섰습니다. 고속도로는 놀라울 만큼 한산했어요. 멀리 뻗은 차선은 수평선과 맞닿으며, 끝없이 이 여행을 초대하는 길처럼 보였습니다. 미국의 고속도로 여행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어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끊임없이 이어지는 트럭 행렬, 그리고 자주 자주 나타나는 휴게소 네온사인까지—이 모든 것이 하나의 장면처럼 겹쳐집니다. 긴 운전을 맡아준 당신 덕분에 저는 창밖 풍경을 마음껏 누리며, 달리는 차 안이 작은 여행자의 방처럼 느껴졌어요.
동쪽 하늘이 점차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더니, 어느새 붉은 빛이 수평선 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빛을 따라 달리다 보니, 마침내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유리 빌딩들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미시간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창 틈새로 스며들어 도시의 첫인사를 건넸습니다. 그 바람은 묵직하면서도 활기차, 마치 재즈 연주의 첫 음처럼 도시 전체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도시에 들어서자 밀레니엄 파크가 맞이합니다. 그곳의 상징인 거대한 스테인리스 조각—현지인들이 더 빈 The Bean이라 부르는 클라우드 게이트Cloud Gate는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완두콩처럼 매끈한 곡면은 도시와 하늘, 그리고 그 앞에 선 사람들의 모습을 왜곡하며 비추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조각 아래를 뛰어다녔고, 여행자들은 카메라를 들고 제각기 포즈를 취했습니다. 그 활기와 반짝임 속에서 시카고는 단순한 산업도시가 아니라, 현대적 예술과 자유가 살아 숨 쉬는 도시로 다가왔습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이 도시의 심장, 시카고 미술관 Art Institute of Chicago이 보입니다. 미술관 입구의 청동 사자상은 고전적인 석조건물의 위엄을 한껏 더해줍니다.
그 안에는 고흐, 모네, 세잔, 호퍼, 그리고 호크니까지 인류가 남긴 예술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상파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이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실제 작품들 앞에 서면 단순한 ‘컬렉션’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울림이 전해집니다.
그날 저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대작 앞에 오래 머뭅니다. 와우, 드디어 호크니의 원작을 보게 되다니! American Collectors (Fred and Marcia Weisman, 1968).
데이비드 호크니
호크니는 영국 출신의 화가이자 드로잉 작가, 무대 디자이너, 디지털 아트 선구자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보는 방식’을 바꾼 예술가여서 동시대의 가장 핫하고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1960년대 팝아트 시대를 배경으로 등장했지만, 단순한 팝화가가 아닌 시각의 실험가로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습니다. LA의 수영장을 그린 시리즈로 세계적 주목을 받았으며, 인물화, 풍경화, 사진 콜라주, 아이패드 드로잉 등 끊임없이 매체를 넘나들며 새로운 표현 방식을 시도해왔습니다.
3미터가 넘는 캔버스 속, 와이즈먼 부부는 정원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살아 있는 부부라기보다, 자신들이 소장한 조각상과 함께 하나의 풍경 속에 고정된 듯 보입니다. 호크니는 초상을 그리면서도 인물을 수집품처럼 배치합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모은 것과 닮아갑니다.” 이 작품은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습니다.
강렬한 태양빛 아래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무심해 보입니다. 그들 사이의 침묵은 조각상의 무표정과 닮아 있고, 그 거리감은 보는 이에게 묘한 유머와 불안을 동시에 줍니다.
We collect things
because they reflect who we are.
수집은 결국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림 앞에 서자 저 또한 질문하게 됩니다.나는 무엇을 축적하면서 살아왔지. 책, 기억, 여행의 순간들, 혹은 관계들… 그것들이 모여 결국 내 초상이 되고 있지 않은가.
시카고 미술관은 단순히 작품을 보여주는 공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시가 사람에게 주는 가르침과 같습니다. 시카고가 철강 같은 견고함 속에서 바람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듯, 이 미술관의 작품들은 인간이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어떻게 소유하고, 또 어떻게 닮아가는지를 보여줍니다.
Collecting is not about ownership,
it’s about a dialogue with beauty.
켈렉팅은 소유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호크니의 그림을 떠나며 저는 시카고라는 도시를 다시 생각합니다. 재즈 같은 즉흥성과 철강처럼 단단한 구조가 공존하는 곳. 외롭지만 풍요롭고, 무겁지만 자유로운 곳. 그 모순 속에서 시카고는 너무나 매력적인 도시였어요.
나는 무엇을 축적하면서 살아왔는가. 책, 기억, 여행의 순간들, 그리고 사람들… 그것들이 모여 결국 내 초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호크니의 대작은 단순한 초상이 아니라, 삶의 거울이었습니다. 시카고까지 이어진 긴 여정 끝에, 저는 그 그림 앞에서 또 하나의 질문을 선물처럼 받았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