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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kim May 19. 2023

나의 왕바다리 선생님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말끝을 흐리는 걸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암, 맞네요. 모양이 이쁘지 않더니... 조직검사 결과 갑상선 암이에요.” 생각할 틈 없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남편은 내 손을 꽉 잡았다.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그날은 우리의 13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몇 주 전부터 목젖처럼 턱 아래 혹이 불어나 있었다. 만져보면 안에 딱딱한 덩어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씩 커지는 것 같기도 해서 기분 나빴다. 집 근처 내과를 찾았는데, 임파선이 부은 것 같다며 항생제 처방을 했고, 꾸준히 일주일 넘게 먹었지만 그다지 차도가 없었다.

다른 병원을 가니 초음파 검사를 해 보자 했다. 의사는 단순 물 혹 같은데,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차라리 모르겠다고 하니, 오히려 신뢰가 갔다.

초음파 본 김에 목 전체와 어깨까지 보자며 차가운 젤을 이리저리 발랐다.

그러다 흠칫 놀라는 표정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갑상선에 있는 혹이 발견된 것이다.

“큰 병원 가야겠어요. 혹시 모르니 조직검사도 하고. 제가 소견서 써 드릴게요.” 전문 병원을 찾아 재검사와 조직검사를 하고 초초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암’이라는 소리에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쩌지. 아직 너무 어린데. 아이가 많이 놀랄 텐데. 부모님께는 뭐라고 하나. 회사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 시기, 우리는 사업의 과도기를 겪고 있었다.

회사는 몇 년째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이었다. 여러 명의 직원이 교체와 퇴사를 반복했고, 재정의 압박에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 일을 계속하나. 무거운 짐이 마음을 짓누를 때면, 이제는 그만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나마 남편과 나는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암’이라니. 귀에서 삐— 소리가 나는 것처럼 순간 멍해졌다.


두 달 뒤, 애써 웃어주는 남편을 뒤로하고 수술대에 누웠다.

하나, 둘, 셋, 넷…. 까지 세었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신마취에서 깨어날때 훅 들어오던 지독한 가스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날 밤, 1초도 잠들지 못하고 시계 초침을 세 듯 밤을 꼬박 새웠다. 목의 절개한 부분이 일자로 잘 맞물려야 했기에, 반듯하게 누워 양쪽 머리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받침대로 고정했다. 수술 부위는 침을 삼키는 작은 진동에도 칼로 찌르듯 아팠다. 목은 다른 부위에 비해 지방이 없고 가늘어 섬세한 잔 근육들이 통증을 더욱 적나라하게 느낀다 했다. 진통제를 맞아도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워, 이 밤이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남편은 함께 밤을 새우며, 아파하는 나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수없이 많은 눈물을 속으로 삼켰겠지.


수술 후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아픈 나를 돌보느라 며칠째 집에 가지 못한 남편은 버거운 회사 문제까지 겹쳐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성대에 딱 붙어있던 종양을 떼어내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던 나는 침울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고요한 적막을 깨 볼까 싶어 TV 리모컨을 눌렀다. ‘곤충, 위대한 본능’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이제 막 시작하고 있었다.


‘왕바다리’, 쌍살벌 중 가장 큰 토종 말벌의 일생을 다룬 다큐였다.

말벌은 무조건 피해야 하는 기피대상 1호 아닌가? 우리는 잠시 모든 걸 잊고 왕바다리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여왕 왕바다리 한 마리가 초봄을 맞아 분주하게 집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다. 나무껍질을 깨물고 침과 섞어, 한 칸 한 칸씩 정육각형의 집을 정교하게 지어갔다. 그리고 몇 개의 집이 완성되니 방 하나에 알 하나씩을 조심스레 앉혔다.

낮에는 물을 한 모금씩 물어와 방이 건조해지지 않도록 한 방울씩 내려놓았다. 태양이 뜨거워지자 쉬지 않고 날개 짓으로 부채질을 해댔다.

비가 오면 벌집 안팎의 물기를 입으로 빨아드려 열심히 뱉어냈다.

드디어 기다리던 알이 부화되기 시작하고 애벌레가 나왔다. 여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왕바다리는 애벌레들에게 단백질을 먹이려고 사냥을 나갔다 들어오길 끝도 없이 반복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가 애벌레들이 먹기 좋게 열심히 먹이를 다듬는 사이, 일이 벌어졌다.

개미떼의 습격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의 일개미가 벌집을 들이닥쳐 애벌레를 쪼아 먹기 시작했다. 애벌레들의 몸부림과 저항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졌고,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개미굴로 옮겨졌다.

잠시 후 여왕 왕바다리가 먹이를 잔뜩 입에 물고 돌아왔다. 텅 비어진 벌집 앞에서 당황한 듯 잠시 우왕좌왕했다. 방마다 얼굴을 깊게 집어넣고 애벌레가 없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분노인지, 아픔인지 모르게 몸을 부르르~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왕바다리는 길게 머뭇거리지 않았다.

지금의 집이 위험하다 생각했는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수고를 처음부터 하나씩 하나씩 다시 시작해 갔다.

또다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왕바다리는 드디어 첫째 애벌레를 성충으로 키워냈다. 어른 벌이 된 새끼들은 어미를 도와 열심히 집을 짓고, 새끼들을 돌봤다. 분주하고 단란한 왕바다리 가족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얼마 후, 벌집엔 여왕 왕바다리 혼자 남았다. 이제 다 큰 벌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것이다. 왕바다리는 안간힘을 쓰며 마지막까지 벌집에 매달려 있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지자, 결국 벌집 아래로 툭! 떨어져 숨을 거뒀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숨길 틈도 없이 동시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 작은 왕바다리 한 마리의 죽음 앞에서 숭고함을 느꼈다. 포기할 만도 한데, 어쩔 수 없었다, 체념할 만도 한데. 그저 곤충의 본능이었다고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과 이유를 알고, 어려움과 난관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끝까지 내가 해야 할 소명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아주 작은 미물이지만 우주만큼 커 보이는 이 뜨거운 삶 앞에서 우리는 목이 메었고 숙연해졌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가끔 여왕 왕바다리를 생각한다.

힘들고 지칠 때, 여기까지 인가보다 싶어 포기하고 싶을 때. 다시 일어설 엄두가, 용기가 나지 않을 때, 여왕 왕바다리의 모습을 떠올린다.


누군가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 했던가.

왕바다리에게 나는 배웠다.

지금 직면한 문제가 나를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내지 않는 것이 나는 무너지게 한다는 것을.

내게 주어진 소명을 이루기 위해 버티는 삶이, 가장 숭고하다는 것을.

매일 아침 건강히 눈을 뜨고, 숨을 쉰다는 것에 감사하다.

변함없는 사랑으로 아껴주는 남편과, 조잘거리며 수다를 떠는 딸과 아들이 너무나 소중하다.

열심히 일할 직장이 있고,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시간. 잠시 쉬면서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잔이 정말 행복하다.

무엇보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

그들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 기도와 사랑에 감동한다. 함께 울고 함께 웃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늘 곁에 있어주니.

이렇게 값진 삶이 있을까.

결국 삶의 마지막 순간, 정말 축복된 인생을 살았노라고. 고백하게 되겠지.

평생에 잊지 못할 ‘나의 왕바다리 선생님’이 그리워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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