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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kim May 19. 2023

사랑하다. 마침내.

“여보, 나 지금 아버지 모시고 한양대 병원 응급실로 가고 있어.” 

“뭐라고? 갑자기? 무슨 일인데 응급실까지 가요?” 

“잘 모르겠어. 근처 내과 가려고 했는데 문 닫을 시간인지 불이 꺼 있어서. 너무 아프시다 하니 일단 응급실로 가 보려고”     

오후 5시 30분. 업무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남편 전화가 왔다.

우리 가족 중, 아버님은 유난히 엄살이 심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다 보니 웬만해서는 아버님이 아프다 해도, 의례 그러려니 생각할 때가 많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의 첫 반응도 역시 그랬다. ‘아이고 얼마나 아프다고 이 시간에 대학병원 응급실까지. 코로나가 극성인데 동네 병원부터 가보시지. 신속항원 검사도 해야 하고, 보호자 동행도 쉽지 않을 텐데.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아버님은 평소처럼 우리 집 막내를 어린이집에서 픽업해 돌아가던 중, 갑작스런 복통에 당황하셨다 한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겨우 운전을 해 집에 도착했는데, 오후가 되면서 갑자기 데굴데굴 구를 만큼 아픈 통증이 찾아왔다고. 당황하신 어머님이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건 어머님도, 모시러 간 남편도 이 시간에 굳이 응급실까지 가야하나 싶어 망설이다 출발을 한 모양이었다. 차에서 아버님은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발판에 쭈그리고 앉아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퇴근시간과 겹쳐 차는 막히기 시작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버님을 보며, “여보, 좀 자리에 앉아 있어요. 운전하는데 위험하게. 좀 참아보지. 왜 이리 애들처럼 유난스럽게 그래요” 어머님은 타박을 하셨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신속항원 검사를 마친 남편과 아버님은 응급실로 들어갔다. 보호자는 한 명만 동행할 수 있었고, 연로하신 어머님이 정신없는 응급실 안에서 당황할게 분명했기에 남편이 남게 되었다. 

“담석인 것 같네요. 급한 대로 진통제로 통증을 잡고, 입원실이 나는 대로 병실로 올라갈게요. 피검사 결과 염증 치수가 높아서 이러다 잘못되면 패혈증이 올 수도 있고, 잘못되면 패혈증 쇼크까지 진행될 수 있다는 점 알고계세요.”

인턴인지 젊은 의사가 설명을 하고는 사라졌다. 진통제가 들어가자 아버님은 한결 편안해졌는지 “무슨, 새파랗게 젊은 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패혈증이고, 쇼크야. 병원은 꼭 안 좋은 얘기만 먼저 한다니까.” 이것저것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드디어 병실이 나와 입원실로 올라갔다.     


새벽 1시쯤 되었나,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서, 곧 꺼질 것 같아. 대효한테 충전기 좀 가져오라 해서 지금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힘들어?”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 남편은 아버님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의례 우리나라 부자지간이 그렇듯 둘의 관계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둘 사이엔 대화가 거의 없고, 막상 대화를 시작하면 의견이 맞지 않아 답답함과 짜증스런 분위기로 끝이 났다. 옆에서 보고 있자면 민망한 상황에 슬그머니 자리를 뜨게 마련이었다. 

아버님은 올해 79세. 80년 가까이 살아오며 굳어진 주관적 생각과, 평소 정보중심의 객관적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편의 대립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매번 동일한 패턴으로 시작해 어색하게 끝이 나는걸 보며, 한번은 “여보, 아버님이 지구가 네모나다고 하면, 그냥 네, 그런 것 같네요 해. 우린 지구가 동그랗다는 걸 알고 있는데. 굳이 모든 증거와 자료를 설명하며 네모나다고 해야겠어? 그냥 대세에 지장 없는 건 한귀로 슬쩍 흘리고 넘어가” 나만의 노하우를 알려줬다. 

남편은 그건 자신에게 절대 불가능하다고. 아버님이 말도 안 되는 의견을 주장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얘기를 하면 이상하게 화가 올라온다 했다. 하긴 나도 친정 엄마가 가끔 그럴 땐, 참아지지가 않고 짜증이 나긴하니까. 우리 엄마가 왜 저러나 싶은 생각에.     


과잉 진료라고 생각해 병원과 의사를 신뢰하지 않기 시작한 아버님은, 손주뻘 되는 간호사에게 반말을 하셨고. 남편은 그런 아버님 때문에 화가 났다. 

“여기 병원이나 의사선생님들, 간호사 모두 아버지를 도와주고 치료 해 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에요. 요즘시대에 나이가 어리다고 반말하고 그러면 큰일 나요. 이분들도 기분 나쁘고, 그런 환자 고쳐주고 싶겠어요” 

아버님은 민망해 졌고, 둘의 분위기는 다시 어색해졌다.      


남편은 충전기를 가지고 온 서방님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고 병실로 올라왔다. 아버님의 침대가 통째로 없어지고 빈 공간만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병실 복도 끝, 응급 처치 실에서 간호사가 긴박하게 남편을 불렀다. 응급 처치실로 달려간 남편은 너무 당황했다. 갑자기 서너 명의 간호사와 의사가 아버님을 둘러싸고 등 아래 얼음 팩을 인정사정없이 깔고 있었다. 아버님은 너무 춥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간호사들은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한 채 얼음을 온 몸에 문질렀다. 아버님은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당황한건 남편뿐이 아니었다. 

젊은 의사는 “에이 씨 어떻게 하지. 빨리 동맥 확보해” 소리를 질렀고, 간호사들은 목과 허벅지 안쪽에 주사를 연결할 관을 몇 군데나 꽂았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1~2시간마다 이뤄진 피 검사에서 아버님의 염증 치수는 몇 배로 치솟았고, 혈압은 갑자기 뚝 떨어졌다. 설마 했던 급성 패혈증 쇼크가 온 것이다. “당장 중환자실 연락해요. 자리 비워달라고” 남편은 의사의 다급한 목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새벽 5시, 남편이 집에 돌아왔다.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너무 오랜 시간 긴장을 해서인지 그만 털썩 주저앉았다. “보호자는 돌아가서 기다리라네. 상황이 안 좋아 지거나 다른 문제가 생기면 의사가 전화한다고” ‘아니. 점심까지 잘 드시고, 멀쩡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졸다 깨다 남편을 기다렸던 나는 아버님이 갑자기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막연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코로나 확진자가 많아지면서 하루 한번 있던 면회도 모두 금지되었다고 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신 다음날, 담당의라며 한 번의 전화가 왔었다. 현재 급성 패혈증 중증 상태라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항생제를 계속 투약하고 있는데 호전이 되지 않는다했다. 이러다 자가 호흡이 힘들어지면 인공호흡기를 달고, 투석을 할 수 있다는. 하루 전만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오고갔다. ‘아버님은 어떻게 계신 걸까, 식사는 할 수 있나? 의식은 있는 상태일까’ 답답한 마음에 전화 통화라도 해 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환자의 안정을 위해서인지 전혀 불가능했다. 

우리 가족 모두는 무섭고 떨리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저 병원에서 전화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지금은 말 그대로 ‘무소식이 희소식’이었다.       


어머님은 매일 눈물로 하루를 보냈다. 50년 넘게 부부로 살아왔으니 얼마나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을까. 성품도 성격도 전혀 다른 두 분은 크게 드러내놓고 다투시진 않지만, 참 평행선 같아 보일 때가 많았다. 어머님은 갱년기를 지나며, 여느 엄마들처럼 목소리가 커졌고, 은퇴 후 특별한 일 없이 방에서 TV와 친구가 된 아버님을 자주 타박했다. 

병원에 가던 그 날도 아프다고 쩔쩔매는 아버님에게 유난스럽다고, 엄살 좀 그만 떨라고 못 마땅해 하셨다. 그렇게 병원에서 헤어진 남편이 중환자실에 들어가고, 어떤 상태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수밖에.     


남편의 마음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어려서 사우디에 두 번이나 나가계셨던 탓에 어린 시절 아버지 없이 지낸 시간이 더 익숙했던 남편이었다. 

“난 아버지랑 즐겁게 놀거나, 정겹게 대화를 나눴거나, 목욕탕을 간 추억이 전혀 없어” 

같이 있으면 오히려 불편해서 은근히 피하게 되는 그 어색함의 원인을 늘 상 말해왔었다. 하지만 언젠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여보, 아버님 산 좋아하시니까 한 달에 한번이라도 같이 산에 가봐. 계속 그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지낼 수는 없잖아. 나이도 많으신데 어른들은 하루아침에 어떻게 될지 모르더라. 나중에 괜히 후회하지 말고”

종종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훈수를 두면, 동의는 하면서도 막상 시작하긴 힘들어했다.      


병원에서, 그것도 매우 급박한 상황을 두 눈으로 생생히 지켜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아버님을 중환자 실로 보내던 순간. 남편은 자신도 모르게 아버님을 힘주어 꽉 끌어안았다. 

“아버지, 괜찮아요. 별일 없을 거예요. 의사들이 치료도 잘 할 거고. 밖에서 기도하고 있을게요. 아무 걱정 마세요” 

그 순간이 자꾸만 떠오른다 했다.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나. 정말 그게 마지막이었다면 난 어떻게 하지’ 순간순간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마다 남편은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주말 저녁, 온 가족이 모였다. 평소 같으면 시끌벅적, 대가족의 정신 사나움과 식사 준비로 분주했겠지만 우리는 조용히 아버님을 위해 기도했다. 남편은 어린 조카들까지 있는 모든 가족 앞에서 고백했다. 

자신이 잘못했다며. 아버님을 은근히 따돌리고, 불편해 하고, 쉽게 짜증을 냈다고. 무료하고 적적해 TV만 보시는 아버님을 모른 척, 못 본 척 했다고. 

그 고백은 곧 나의 고백과도 같았다. 우리 모두는 엉엉 소리 내어 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모두 알게 됐다. 평소에 다정하게 말 한마디라도 할 걸. 날씨 좋을 때 산이라도 같이 한번 가볼걸. 점심에 시간을 내어 밖에서 맛있는 고기라도 사드릴걸. 어머니 몰래 용돈을 주머니에 찔러 드릴걸. 무슨 얘기를 하던 무조건 옳다고 맞장구 칠 걸. 

그렇게 꼬박 열흘이 지나갔다.       


아버님은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건 오롯이 아버님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는 몫이었다. 지독히 외로운 싸움을 치르고 있었다. 울고 있을 아내와, 노심초사할 자녀들, 대학 합격에도 기뻐하지 못하는 큰 손주와, 할배가 돌아오기만 손꼽아 기다리는 4명의 손주들을 생각하며. 

한번 달면 떼기가 거의 어렵다는 인공호흡기도 떼어내고, 투석 직전까지 갔던 신장도 제 기능을 회복해 갔다. 항생제도 효과를 발휘하고, 두 번의 수술로 담석을 빼고, 담낭도 제거했다.

“전 병실로 못 올라오실 줄 알았어요. 아버님, 대단 하세요”

일반병실로 올라왔을 때 담당의가 말했다.      


3개월 뒤, 아버님의 온전한 회복을 기념하며 12명 모두 가족여행을 떠났다. 

물론 일 년에 한두 번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그러나 이번엔 우리 사이에 흐르는 공기부터 다르게 느껴졌다. 조금의 불편함이나 걸림이 없는, 온전하고 편안한 그런 기분. 

그것은 사랑이었다.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가득 차있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는 것. 그리고 살아있음에, 함께 웃고, 떠들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길 수 있는 것이 그저 감사했다. 

“너무 좋다. 고맙다. 행복하다. 나는 받은 복이 많다”아버님은 여행 내내 같은 얘기를 반복 하셨다. 

그리고 남편은 드디어 아버님과 목욕탕에 갔다. 늦둥이 손자까지 3대가. 그전엔 절대 목욕만큼은 같이 못 한다고 했었는데 말이다.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나오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은 말했다.

“여보, 전에도 머리로는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늘 어떤 불편한 선들이 존재했어. 그리고 결코 그 선을 넘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고. 그런데 이번 일을 겪으며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아버지를 꽉 끌어안았던 순간, 아버지와 내 사이를 갈라놓았던, 그 불편했던 선들이 사라졌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마음이 올라왔을 때 말이야. 

그리고 사랑으로 내 마음이 가득 채워졌을 때, 사실은 내게 결핍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 나도 미처 알지 못했던 빈 공간 같은 결핍이. 

하지만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 순간, 내 안에 남아있던 결핍의 공간이 비로소 가득 채워졌다는 걸 경험한 거야. 

여보, 정말 놀라운 게 뭔지 알아?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는 만큼, 나의 삶이, 나의 감정이 정말 풍성해 지는 것 같아.”      


어제 남편은 아버님과 점심 식사를 했다. TV에서 계모가 아이를 굶기고 학대 해 안타깝게 죽게 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저 봐라, 계모는 애들을 제대로 키울 수가 없어. 옛날에도 보면 계모가 키우는 집 애들은 공부도 안 시키고 고생만하고, 저렇게 구박받고 살았다고” 

“아버지, 그런 얘기는 어디 가서 하지 마세요. 아니 얼마나 좋은 새엄마가 많은데, 훌륭하게 애들 잘 키우는 집도 많고. 그렇게 얘기하면 요즘 큰일 난다구요.” 

티격태격하는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는 안다. 서로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고 있는지.     


아버지를 사랑하다.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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