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식문화의 하드웨어적 업데이트 장본인은 누구?
태어나보니 우리 집은 졸부였다. 엄청나게 부유했던 부모님은 돈만 많았지, 명예와는 거리가 멀었다. 부와 걸맞은 신분을 갖추기 위해 집안 어르신들은 딸들을 앞세워 명망 있는 가문과 짝을 맺으려고 안간힘을 쓰셨다. 나 역시 어린 나이에, 누가 들어도 알만한 대단한 가문에 팔려 오다시피 시집왔다.
와보니 소문난 그 집안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시아버님을 비롯하여 아주버님, 심지어 내 남편까지도 본처 외에 정부를 한 두 명씩 끼고 있었다. 애첩들의 텃새는 상상을 초월했다.
더욱 놀라은 것은, 그들은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다. 대소변이 마려울 땐 마당의 아무 곳이나 가서 엉거주춤 선 채 볼일을 보았다. 몸도 잘 씻지 않아, 남자들에게서는 늙은 염소 냄새가, 여자들에게서는 양파 썩은 냄새가 났다.
이 이야기는 픽션이 아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프랑스 앙리 2세에게 시집온 카트린느 드 메디치의 스토리를 1인칭 시점으로 각색한 것이다.
프랑스 요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그중 역사적으로 간과할 수 없는 한 인물이 있다. 바로 카트린느 드 메디치이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매우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메디치 가문의 재력은 유럽 전역에 영향을 끼칠 만큼 대단했다. 딸들은 유럽 각국의 국왕에게 시집보내졌고 아들들은 서방 정교회의 차기 교황으로 길러졌다.
어디 그뿐이랴.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퍼부은 아낌없는 지원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문예부흥을 꽃피웠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르네상스’이다. 한 마디로 메디치 가문은 정치, 종교, 예술 등 모든 방면에서 전 유럽을 쥐고 흔들었다.
1533년, 카트린느가 14살이 되던 해에 앙리 2세에게 시집왔다. 그녀가 왔을 때, 프랑스 왕궁에는 앙리 2세의 부친이 있었고 그의 친형도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에게는 본처 외에 한 두 명씩의 정부가 있었다. 당연히 그녀의 남편인 앙리 2세에게도 이미 19살 연상의 애첩이 있었다. 그녀들의 치마바람과 권모술수는 왕궁을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음모와 혈투가 얼마나 굉장했을지,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린다.
그 와중에, 카트린느라는 여성은, 자신의 남편과 자녀 10명 중 3명의 아들을 차례로 왕좌에 등극시켰다. 프랑스 역사상 피도 눈물도 없는, 가장 잔인하고 냉혹한 권력지향적 여성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이다. 그녀가 권력을 쟁취한 과정을 살펴보면 너무 놀라워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당시 금서였던 마키아벨리 <군주론>을 교과서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정치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살살 녹을 정도의 화술을 구사했다는 기록만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외모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던 것 같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그녀와 관련된, 엄청나게 큰 규모의 그림들이 무척 많다. 카메라가 없던 그 시절, 화가를 대동하여 그녀가 등장하는 국. 내외 중요 행사를 그림으로 남기도록 했다. 당연히 그녀에게 유리한 관점에서 그리도록 했을거라고 쉽게 추측이 가능하다. 일종의 언론 플레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했을까.
그녀는 남편을 여의고 난 후부터 항상 검은색 드레스만 착용하여 '검은 베일 속의 백합'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왕비의 검소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자연스럽게 민심까지 얻게 되었으니, 이것 역시 정치적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프랑스를 이룬 민족은 ‘골(Gaule)’족이다. 프랑스어로, 남자는 ‘골루와(gaulois)’, 여자는 ‘골루와즈(gauloise)’라고 부른다. 1500년 대만 해도 프랑스가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고 건물에 화장실이라고는 없는 미개한 '골'족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믿기지 않는 불편함을 준다.
카트린느는 시집오면서 이탈리아로부터 요리사를 대동했다. 친정에서 사용하던 포크, 나이프 등의 식기류와 함께 여러 조리도구도 가지고 왔다. 문화의 전파는 물의 흐름과 유사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 미개했던 프랑스 사람들은 식사 시 그녀가 사용하는 도구를 보고 적잖이 놀랐고, 곧 우수한 이탈리아 문화를 넙죽 받아들였다.
우리는 모두 구강기를 거치면서 손에 쥔 것을 입으로 가져다 넣던 본능이 태곳적 바닷속에 잠겨버린 화석처럼 잠재의식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영, 유아기를 지나서까지, 도구가 아닌 손을 사용하여 앞에 놓인 음식을 향해 공격적으로 돌진한다는 것은 여전히 동물적 본능이 살아있다는 뜻이다. 아울러 그 본능이 삶의 다른 영역들에 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외면하기가 어렵다.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인 인간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정서적으로 큰 영향을 받는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는 동양인에 비해 테이블 위에서 ‘칼’과 삼지창을 휘두르는 서양인이 아무래도 호전성이 강하다. 주변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연에 동화되고 녹아들려는 동양문화와,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써 자연을 바라보는 서양 문화와의 차이는 도구 사용 측면이라는 출발점부터 다르기 때문에 생긴 상이함인 셈이다.
칼이라는 것을 쥔 카트린느는 자신을 업신여기던 프랑스 사람들 보란 듯이 강력한 권력을 거머쥐었다. 그것은 도구를 사용하는 고등 문화의 인간이 본능에 충실한 하등 문화의 인간 위에 군림하는 현상 중 하나였다.
문화적 강국으로서 콧대가 대단한 프랑스가 오래전 미개했었다는 것은 참 웃기는 일이다. 이탈리아에서 온 그녀가 아니었다면, 손으로 음식을 움켜쥐고 와구와구 먹던 프랑스인들이 도구의 인간으로 개화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프랑스인들은 카트린느가 시집왔을 때 그녀를 욕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녀가 벌인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¹의 대학살과 같은 잔인한 짓이 바람직하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미천한 장사꾼 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그녀 덕분에 프랑스 식문화의 하드웨어적 격조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니까.
각주1.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나바르 왕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이곳은 프로테스탄트를 국교로 하던 나라였고 국왕은 프랑스 왕족의 먼 친척뻘이었다. 카트린느는 그 나라마저 삼키고 싶은 욕심에 막내딸인 마르게리트를 나바르의 왕자와 결혼시켰다.
프랑스 황태후는 결혼식을 축하하자며 숨어있던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을 불러들였고 한자리에 모인 개신교도들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개신교도의 목을 치면 그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서 센 강에 퐁 빠졌다고 한다. 희생자 수는 3만 명이라고 하나 지방을 합치면 7만 명까지 추정되고 있다.
세계 역사상 가장 무서운 범죄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사건은 권력에 눈먼 한 왕비의 악한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도 이 소식을 듣고 공포를 금치 못했으며 영국 여왕은 상복을 입고 개신교도들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훗날 프랑스 왕위에 앉아 있던 그녀의 아들이 어이없이 죽으면서 결국 자신이 학대했던 개신교도인 나바르 왕이 프랑스 왕으로 취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쳤다. 이로 인해 그녀의 섭정이 막을 내렸으니,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 큰 재앙이자 형벌이었다.
<여왕 마고>라는 영화가 이 역사적 사건을 잘 묘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