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식 티키타카
오늘 갑자기 생각난 프렌치 유머가 있다.
두 명의 등산가가 있었다. 그들은 겨울산에서 헤매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거의 생명을 잃을 위기였다. 그러던 중 인명구조견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발견되었다.
둘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 인간의 오랜 친구가 왔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어, 그리고 멋진 개도 한 마리 있군!”
웃음 포인트에 대해 감이 오는가?
인명구조견은, 세인트 버나드(Saint Bernard)라는 종류로 항상 목에 술통을 매달고 있다.
‘개’라는 동물은 흔히 인간의 친구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 등산가는 ‘술’이 더 반가웠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 개도 한 마리 있네”라며 반전 멘트를 날린다.
본인이 얼어 죽을 상황인데도 그런 유머가 나왔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다음 유머는 또 어떤가.
어떤 남성이 담배를 피우려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할 때 그는 라이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 근처에 담배를 피울 것처럼 생긴 남성이 지나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혹시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 말에 그 남성은, “저, 담배 안 피우는데요.”
그러자 담배를 한 손에 쥐고 있던 남성 왈, “저도 그래요.”
아니오(Non)라는 상대방의 말에 나 역시 그렇다는 것을 말할 때 Non plus라고 대답하는 불어 특유의 문법 때문에 이 말이 유머로써 가능하다.
다음은 <두려움의 도시(La cité de la peur)-1994년>라는 프랑스 영화에 나온 19금 유머이다.
어떤 남성이 파티에서 맘에 드는 여성을 만났다. 그는 그녀를 유혹하여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집안에 들어온 남성이 여성에게 묻는다.
"모차르트 음악 틀어드릴까요?"
"네, 좋아요."
"어떤 곡을 원하시죠?"
"최신곡으로요."
남성은 위스키 한 병을 갖고 와서 그녀에게 또 묻는다.
"위스키 마실래요?"
"네, 손가락 하나만큼 원해요."
"앗! 당신은 위스키를 먼저 마시고 싶지 않은 건가요?"
그녀는 곧 머리를 풀었고, 그들은 키스를 했다.
여러분은 이 상황이 이해되는가? 술을 권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양을 원하는지에 대한 대답으로의 프랑스식 언어 습관을 모르면 이 유머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적은 양의 술'이라는 뜻을 가진 프렌치 관용 표현은 바로 <손가락 2개 (Deux doigts)>이다. 손가락 2개를 술잔에 가로로 댄만큼의 높이 정도로 따른 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여성은 '손가락 2개'가 아니라 "딱 손가락 1개요(Just one finger)"라는 '메타포'적인 대답을 했다. 만약 그녀가 "손가락 2개요(Two fingers)"라고 했다면 아마 남성은 여성에게 위스키를 따라주었을 것이다. 직접적인 표현이 아닌, 귀족적 품격을 느끼게 하는 그녀의 말은 그의 남성성을 자극했다. 그리고 둘은 사랑을 나누었다. 손가락이 무슨 뜻인지, 손가락으로 무엇을 할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대화 중 상대방의 유머 코드를 읽어내는 능력과 적절하게 응답하는 재치는 항상 필요하다. 무슨 말인지 받아쓸 정도로 내용을 훤히 꿰뚫고 있어도 간혹 그들이 박장대소를 하는 포인트에서 난 전혀 웃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따라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전에 한 번, 전혀 옷기지 않는 프렌치 블랙유머에 따라 웃었다가 옆 사람이, “넌 저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니? 너네 한국사람들도 우리처럼 생각하니?”라는 질문을 받아서 난처했던 적이 있었다.
그냥 가만있을걸, 왜 따라 웃었을까 순간 아찔했다. 오히려 당당하게 "너네는 이게 웃기니? 참 고약하다. 왜 웃어야 하는지 설명해봐”라고 그들에게 면박을 줬어야 했는데,,,, 이제야 무릎을 치고 있다.
현존하는 프랑스 계급제
‘황제’, ‘왕궁’, ‘왕권’ 등과 같은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절대권력, 계급, 등의 단어가 함께 떠오른다. 왕권신수론도 있다.
왕권신수론 하면 태양왕이라는 별칭을 가졌던 루이14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짐이 곧 국가니라!”라는 어록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그 말을 루이14세가 한 게 아니라 볼테르나, 그 당시 루이 14세의 정적들이 퍼뜨린 것으로 보고 있다.
옛날에는 나라마다 계급제가 있었다. 프랑스도 그랬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은, 프랑스는 현재에도 눈에 보이지 않게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 같은 분이 절대 나올 수 없는 구조이다. 정치가 집안에 정치가 후손이 나오고, 교수 집안에 교수가 나온다. 그들의 성(姓)씨에, 대대로 가문이 생업으로 삼아오던 직업이 나타나 있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프랑스 대통령은 거의 모두 ‘그랑제꼴(Grandes Écoles)’이라는 명문대 출신이다. 그 학교는 프랑스 전체 고등학교 졸업생 중 상위 3%만 갈 수 있는 명문이다.
정재계 쟁쟁한 인물들은 대부분 ‘그랑제꼴’ 출신이다. 바꿔 말해,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이 높은 사회에 발을 들여놓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는 말이다. 태생이 귀족이라면 모를까.
'그랑제꼴'을 제외한 프랑스 대학은 모두 평준화되어 있다. 학교 명칭도 ‘파리1대학’, ‘파리2대학’, ‘파리3대학’… 이런 식이다.
90%의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 그리고 그들은 평준화되어 있는 대학에 진학한다. 반면, 그들을 지배하는 엘리트 계층은 철저하게 차별화되어 있고 특별한 학교에 진학한다. 계급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겉으로는 똑같아 보인다. 이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보기와는 달리 매우 권위적이고 배타적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엘리트 위주의 교육철학은 유급제도에서도 나타난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학생들은 해마다 진급시험을 치른다. 일정 점수에 미달될 경우, 다음 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유급을 하게 된다.
의대에 진학한 학생들은 1학년이 끝날 무렵 콩쿨을 치러서 통과된 학생만 2학년에 진급할 수 있다. 시험 명칭도 무려 ‘콩쿨’이다. 통과시키는 학생수는 국가가 정한다. 보통 전체 학생 중 10% 안팎이 통과하게 된다. 한번 떨어진 학생에게는 한 번 더 도전할 기회가 주어지는데, 2번 실패하면 프랑스 전역의 그 어떤 의대에도 재입학이 불가능하다. 잔인해 보이지만, 어찌 보면 학생의 시간을 절약해주는 현명한 제도라는 의견도 있다. 재능이 없으면 일찌감치 포기하란 소리다.
최근 마크롱 대통령은 의대 교육과정을 개편하여 1학년 말에 실시하는 콩쿨을 없애겠다고 했다. 더 많은 의료인을 양성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교육 시스템 전체적으로 실시되는 유급제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프랑스가 소수의 엘리트만을 위한 나라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프랑스의 귀족들은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매우 견고하고 체계적으로 형성해 왔다. 귀족 가문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가장 쉬운 판별은 바로 이름이다. 어떤 특정 단어가 성(姓)에 들어가 있으면 그 집안이 귀족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제18대 대통령이었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의 이름에 ‘드(de)’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귀족 가문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집안의 인물 중 성과 이름이 지명이나 도로이름으로 명명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가문을 귀족으로 친다. 그 외에도 가문이 소유한 성(城)의 규모, 자산, 연간수입, 집안 도우미 숫자까지, 귀족으로 분류되는 여러 기준들이 실재한다.
사회적 차원의 계급의식
프랑스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한다든지, 간단한 모임을 가질 경우, 난 뭐, 불어나 영어가 서툴러서 아무 말하지 않고 경청만 해야지, 라는 태도로 있으면 안 된다. 물론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허나 말없이 가만히 식사만 한다면 완전히 무시당하는 게 또 프랑스 사회이다. 아니 무시만 당할 뿐이랴. 아예 식탐 많은 짐승으로 분류된다.
왜 그럴까.
프랑스에는 오래전부터 이런 풍조가 있다.
“나는 말한다. 너는 듣는다. 고로 나는 윗사람이다. 내 말을 듣고만 있는 너는 나의 아랫사람이다”
프랑스의 유명 작가이자 심리학자인 쟝 프랑수아 마르미옹(Jean-François Marmion) 도 이런 말을 했다.
"멍청한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근거 없이 자만한 사람이며, 또 하나는 남이 하는 쓴소리를 듣고만 있는 바보 같은 인간이다."
말하기 능력은 프랑스인들의 암묵적인 사회 계급에 대한 개념이자 척도이다. 상대방이 계속 뭔가를 말하고 있고 난 계속 듣고만 있다면 얼마 안 가서 상대방은 마치 내 윗사람인 것처럼 행사를 한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의 대화는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응수를 한다. 마치 핑퐁 볼이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말과 말 사이에 공백이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상대방이 ‘말'이라는 무기를 맘껏 휘두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반드시 받아쳐야 한다는 것이다. 과묵함을 신사의 덕목으로 하는 우리나라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태어나 보니 우리 집이 평민 가문이다. 지능도 그리 뛰어나지 않아 그저 그런 학교를 나왔다. 그것도 서러운데, 식탁에서마저 짐승 취급을 받는다면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가.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은 말이라도 똑 부러지게 해야 한다.
프랑스의 격언 중, “딸을 출가시킬 때 지참금은 없어도 ‘말하기’만큼은 꼭 가르쳐서 보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프랑스 문법’이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딸을 시집보낼 때 혼수는 못해줄지언정, 논리적으로 말하는 기술은 꼭 가르쳐서 보내야 한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말하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다.
대문 앞에서 이웃과 마주치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들은 엄청난 분량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러니 식사초대나 파티 같은 경우는 오죽하랴.
줄잡아 3시간에서 5시간 정도 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눠야 하는 파티가 사실 엄청난 고역이다. 그것이 계속 서있어야만 하는 스탠딩 칵테일 파티라면 거의 초주검이 된다. 빛의 속도로 토스하는 대화 속에 다리는 빛의 속도로 후들거린다.
나는 개인적으로 모국어인 한국말 잡담도 버겁다. 주제 없이 마구잡이로 튀는 무계획적인 잡담이 왜 그렇게 어려울까. 나름 적절하게 대화를 이어가려고 하다가 좌중에게 찬물을 끼얹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대로는 안 된다. 나의 총체적인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진 못하지만, 적어도 또라이라는 느낌은 없애야만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묘수가 있다.
사회성 제로의 내가 살아남는 법!
일단, 저녁 파티를 가기 전에 요즘 세계적으로 이슈가 될만한 뉴스 기사를 한 두 개 정도 읽고 간다. 내 말주변 상, 그들이 하는 대화 중간에서 이리저리 화려한 언변으로 받아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맨 먼저 서두를 꺼내는 거다.
인사를 하고, 날씨 얘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될 무렵에, 종교나 정치 같은 민감한 주제를 제외한, 좀 흥미롭다 싶은 주제를 슬쩍 꺼낸다. 파티에 오기 전에 미리 연구해뒀던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 주제에 대해서 말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미리 예습을 했기 때문에, 그 주제에 대한 화젯거리를 풍부하게 갖고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비교적 대화를 수월하게 풀어갈 수 있다.
그날 저녁의 주된 대화의 흐름을 선수 쳐서, 내가 대화하기 편한 주제로 초반에 프레임을 설치하는 수법이다. 이렇게까지 애를 써야만 하나 싶어 웃길 때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프랑스인들의 빠른 대화 속에서 톨레랑스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대화를 통해 사회적 지위를 올릴 자신이 있는가?
티키타가 능력은
그 자체로 경쟁력이고,
계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