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체류증 변경 & 직장 구하기(4)
독일이 의약품으로 유명한 나라라면, 프랑스는 화장품과 향수로 유명하다. 인접한 나라이지만 독일과 프랑스는 많이 다르다. 독일을 대표하는 술인 맥주는 공기와 접촉할수록 맛이 떨어지지만, 프랑스를 대표하는 술인 와인은 공기와 접촉해야 풍미가 상승한다. 음악적 분위기의 독일과 미술적 분위기의 프랑스 등, 문화, 국민성, 음식, 예술적 성향까지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르다.
내가 경험한 독일은, ‘항생제’ 처방과 판매에 있어서 국가적 차원으로 관리하는 철저한 나라였다. 그에 비해 프랑스는, 하루 항생제 1정씩 1주일 복용하라는 의사 처방에도 10정 들이 한통을 판매해버린다. 어쩔 수 없이 항생제 3정은 잉여분이 되어 그냥 버려지거나 약물 오남용의 사례가 되기도 한다.
‘약국’은 의약품을 판매하는 곳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의 약국은 화장품도 판매한다. 어디 화장품뿐인가. 의료기구, 목발, 운동화 깔창, 샌들, 샴푸, 염색약, 스타킹, 심지어 칫솔과 손톱깎기까지 취급한다. 그야말로 잡화점이 따로 없다.
그래서 프랑스 약국에는 약사가 아닌 직원들도 많다. 그들은 의약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건강보조식품 판매원은 그나마 건강과 관련 있는 일이지만, 화장품 브랜드에서 나온 판매원은, ‘이들이 약국에서 도대체 뭘 하는 거지?’ 하는 의아함을 자아낸다. 그게 어디 그들 잘못이겠냐마는, 애초에 화장품이라는 품목이 어떻게 약국에 진입하게 되었는지, 무척 재미있는 일이다. 프랑스인들이 화장품을 높은 가치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닐는지.
사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화장품 가게까지 가지 않고 동네 약국에서 손쉽게 질 좋은 로션을 구입할 수 있으므로 그것이 굳이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
게다가 프랑스 약국은 한국 단체관광객들의 성지순례 코스이지 않은가. 그곳에선 한국의 백화점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화장품을 구입할 수 있다. 약국에 입장하는 관광객의 표정은 경건하다 못해 비장미까지 느껴질 정도이니, 누가 약국 내 화장품 판매를 정죄할 수 있겠는가.
각설하고, 내 입장으로 돌아와야겠다.
프랑스에서 추방되지 않기 위해, 나는 한 달 이내에 프랑스 기업에 채용되어야 했다. 고용계약서를 경시청에 제출해야 하는 조건으로 체류증 변경을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뛸 듯이 기뻤지만, 지원하는 곳마다 계속 거절당하다 보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이젠 더 이상 지원해볼 회사마저 눈에 띄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던 중, 반짝이는 뭔가가 나의 뇌리를 스쳤다.
“아 맞다! 약국!!”
파리에는 단체 여행객을 받는 규모가 큰 약국이 많다. 일명 ‘김약국’, ‘진약국’이라는 곳도 있으니 우선 그곳부터 먼저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손에 이력서를 들고 파리에서 손꼽히는 유명 약국을 발로 뛰며 돌았다. 라데팡스, 마레, 발라르, 에펠탑 근처, 몽파르나스, 생 제르망 데프레 등을 훑었으나, 모든 약국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채용 계획이 없다고 했다.
어깨가 축 쳐진 채 마지막으로 D 약국에 갔다. 그곳의 화장품 담당 매니저를 만나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곳 역시 직원 모집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실망하여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매니저가 나를 불렀다. 혹시 Rexaline이라는 화장품 브랜드의 이사를 한번 만나볼 의향이 있냐고 물었다.
“당연하죠! 의향이 있고 말고요!”
내가 Sabrina를 만난 건 아직도 추운, 늦겨울인 2월 24일, 점심때였다.
우리는 샹젤리제 거리의 C 레스토랑에서 만나자고 이야기가 되었다. 그 분과 나 사이에는 D약국 매니저가 중개자로 있었다. 나 혼자 들이미는 것보다 지인의 연이 닿으면 아무래도 채용 가능성이 더 높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회사의 중역이시니 연세가 있으실 듯했다. 나는 점잖은 정장 차림으로 나갔다. 12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은 그쪽에서 잡았다. 초면에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는 건 아닐 테고, 왜 하필 딱 식사시간일까? 살짝 부담스러웠지만 나로서는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5분 전에 도착한 나는 Sabrina 이름으로 예약된 테이블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 나 참, 너무 일찍 왔나? 아니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는 게 예의 바르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
5분이란 시간은 무척 길었다. 시계를 보고 또 보았다. 12시가 되었을 무렵, 내 눈은 문쪽으로 고정되었다. 혹시 그분을 놓칠까 봐.
12시 5분이 되었다.
‘조금 늦으시네.’
12시 10분이 되었다.
‘나와의 약속을 잊으신 건 아닐까?’
12시 15분이 되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혹시 D약국 매니저로부터 연락이 올지도 몰라.’
문자 온 게 없나 확인하려고 막 핸드폰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레스토랑 문이 열렸다. 빨간색 미니스커트 원피스에 흰색 쟈켓을 어깨에 걸치고, 검은색과 빨간색이 매치된 크리스티앙 루부탱 핸드백을 든, 세련된 금발 미인이 들어왔다. 나는 그 여성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내가 앉은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난 놀랐다. 그녀의 늘씬한 두 다리가 <또각, 또각> 모델 같은 스텝을 밟으며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아닌가.
“안녕하세요. Sabrina라고 합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어라?’
연예인처럼 화려한 차림에, 너무 여리여리하게 젊고, 치명적으로 예쁜 여성이라, 설마 그녀가 나와 약속한 Rexaline 마케팅 이사님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이가 많아봤자 20대 중반 내지 후반으로 보였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어떻게 큰 회사 중역이 될 수 있을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건넨 명함을 보니 성(姓)에 De가 있다. 그럼 그렇지. 프랑스에서 나 같은 평민은, 아니 노동 허가도 받지 못해 쩔쩔매는, 평민보다 못한 외국인 신분은 감히 얼굴도 뵐 수 없는 귀족이었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고귀한 아우라는 정말 경이로웠다. 기품이 넘치면서도 겸손한 표정과 몸짓은 그녀가 꼭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 같았다.
Sabrina : “점심시간에 뵙자고 해서 정말 죄송해요. 제가 점심때가 아니면 도저히 당신을 만날 시간이 없어서요. 괜찮으시죠?”
나 : “아 네, 그럼요. 전 괜찮아요.”
Sabrina : “흠, 그럼 한번 골라볼까요? 이 집 음식이 무척 맛있답니다. 오늘 점심은 제가 살 테니 마음껏 드세요.”
나 : “감사합니다.”
우리는 식사하는 내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직자인 내가 주로 이야기를 하는 입장이었다. 아쉬운 게 많아서 그럴까. 나의 스피치 자세는 매달리다시피 안쓰러운 모양새였다. 반면 그녀의 경청자세는 무척 훌륭했고 사이사이 대화를 이어가는 센스 역시 고상하고 탁월했다.
그녀는 내게, Rexaline의 앰배서더가 되어 브랜드 홍보담당을 맡아 달라고 했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긴장했지만 이야기는 잘 풀리고 있었다.
미리 준비해온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질 무렵, 우리의 식사도 거의 끝났다. 그녀는 내게 디저트를 권했다. 그러나 그녀는 디저트를 먹지 않았다. 나만 디저트를 먹자니, 마치 내가 눈치도 없는 멍충이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녀는 나를 전혀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내가 디저트를 끝내기까지 기다린 그녀는 민트차를 시켰고 나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시켰다. 차를 시키면서 웨이터에게 자신이 늘 마시던 스타일로 차를 내려 달라고 특별 주문을 했다. 평소에 점심식사를 항상 이 레스토랑에서 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식사의 마지막 단계인 차와 커피가 나왔다. 아울러 우리의 대화도 슬슬 마무리를 지어 가던 참이었다.
나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Sabrina도 천천히 차를 따라서 한 입 머금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는 갑자기 웨이터를 불렀다. 웨이터의 귀에 뭔가 소곤소곤 이야기하자 그 웨이터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뺨에서 귓볼까지 순식간에 레드와인처럼 빨개졌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찻잔과 티포트를 가져갔다.
갑자기 어찌 된 일인지 의아했다.
나 : “무슨 일인가요?”
Sabrina : “아~ 별 일 아니에요. 자, 식사가 끝난 것 같으니 우리 이제 일어설까요?”
나 : “당신이 아직 차를 못 마셨잖아요?”
Sabrina : “아 괜찮아요. 그냥 마신 걸로 하죠 뭐.”
그녀는 앉은자리에서 계산을 마쳤고, 우리는 일어났다. 걸어 나오다가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문 근처로 오니, 레스토랑의 전 직원과 지배인, 그리고 식당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까지 2열 종대로 정열하여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와 내가 그 사이를 지나가자,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레스토랑 사장님이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굽신굽신 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부드러운 자세로 화답하며 끝까지 품위를 지켰다.
레스토랑을 나오자마자 나는 다시 한번 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민트차가 나왔는데, 한 모금 마셨더니 차에 설탕이 이미 들어있었어요. 나는 원래 차에 설탕을 넣지 않아요. 아마 새로 온 웨이터가 내 취향을 모르고 넣었나 봐요. 뭐, 그 정도 실수는 아무것도 아니죠. 나는 이 레스토랑을 참 좋아한답니다. 다들 얼마나 친절한지 몰라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세 번째로 놀랐다. 원래 차든 커피든 주방에서 미리 설탕이 가미되어서 나오는 법은 없다. 손님 취향껏 첨가하시라고 설탕은 언제나 따로 나오게 되어 있다. 만일 모로코식 민트차였다면, 전통적으로 설탕이 가미되는 게 원칙이긴 하다. 하나 Sabrina 가 주문했던 차는 유럽식 민트차였다. 설령 모로코식이었다 할지라도, 설탕 가미를 피해달라고 특별히 부탁한 손님의 청을 레스토랑 측은 아무 말 없이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자, 이런 상황이라면, <손님은 왕이다> 풍조의 우리나라에선, 이게 뭐냐고 웨이터를 불러 한바탕 소란이라도 피울 법하지 않은가. 그녀는 차원이 다른 우아함으로 신참 웨이터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자신의 위신도 지켰다.
사회 구조 피라미드의 아래쪽으로 갈수록 거칠고 치열한 반면, 위로 갈수록 여유롭고 근사해진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녀의 자세에는
“나는 품위 있는 윗사람이야.
아랫사람의 사소한 실수 정도는
관대하게 봐주는 게 윗사람의 도리이지.”
라는 마인드가 배어 나왔다.
그녀는 정말 귀족이었다. 허울뿐이 아닌…
P.S 아, 그래서 채용은 어떻게 되었냐고?
안타깝게도, Rexaline 인사 담당자가 내게 노동이 허가된 체류증을 갖고 오면 고용계약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경시청에서는 고용계약서를 갖고 와야 노동을 허락하는 체류증을 발급해준다나? 뭐 이런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다 있는지…
아, 물론, 채용이 어렵다는 말을 Sabrina 입을 통해 듣지 않았음은 자명한 일이다.
내게 귀족적 우아함을 체험하게 한 그녀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여전히 뒤돌아 달려나갔다. 내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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