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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사라 Sarah LYU Oct 10. 2022

가슴과 허벅지 노출 중, 무엇이 더 섹시한가?

프랑스식 섹시의 기준 - 여성이여! 가슴을 해방시켜라!

프랑스 TV를 보다 기절할 뻔했던 적이 있었다. 공영방송 채널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프랑스에 처음 갔던 22년 전. 모든 식구들이 TV 앞에 모이는 황금 시간대인 저녁 8시였다. 운동 경기 중, 치어리더 복장을 하고 유방을 다 드러낸 앳된 여성 2명이 나와서 응원하는 모습이 방송되었다.


그녀들은, 양손에 잡고 흔들어야 할 술뭉치, 일명 폼폼(pom-pom)을 양쪽 유두에 걸어 길게 늘어뜨리고는, 손대지 않고 폴짝폴짝 뛰는 행동만으로, 좌측으로 빙글빙글 돌렸다가 그다음 우측으로 빙글빙글 돌리는 등의 묘기를 자유자재로 보여주었다. 뛰면서 그 커다란 가슴이 아래 위로 출렁거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무슨 이런 나라가 다 있나?” 그 당시 내겐 기함할 만한 문화 충격이었다.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고 섹시하다고 느끼는 신체 부위가 나이별로 다르다는 말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대체로, 10대는 얼굴, 20대는 목선과 헤어스타일, 30대는 가슴, 40대는 허리와 둔부, 50대는 다리의 각선미, 60대 이상은 몸 전체를 본다고 하여 참 흥미롭다고 생각했었다. (나이가 들수록 시선이 점점 내려가다가 마지막으로 전체를 한번 죽 훑다니...... 복습인가?)


이성에 대한 선호도가 연령별로 달라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하다. 이는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나이에 따라 다른 전술을 구사해야 효과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앞서 언급한, 남성의 눈에 섹시하게 보이는 여성의 신체부위에 대해서 한번 보자.


여러분은 여성의 가슴 노출과 허벅지 노출 중
어느 쪽이 더 섹시하다고 생각하는가?


일반적으로 숏팬츠를 입은 여성보다 가슴이 노출된 상의를 착용한 여성에게 더 눈길이 갈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것에 대한 이유로는, 가슴은 남성에겐 없는 부위이기 때문이다. (다리는 남성에게도 있지 않은가!)


예전에 어떤 한국 남성 인플루언서가 “가슴골이 노출된 옷을 입고 교회에 가는 여성은 다 회개해야 한다”라고 자신의 SNS에 올렸다가 대중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여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 여성을 보고 음탕한 마음을 품었거나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긴 남성들이 회개해야 하는 게 더 맞는 말 아닐까. 내 말에 대해 남성들의 의견은 또 어떨지 모르겠다. 요즘 MZ 세대는 젠더 간 갈등이 엄청나다고 하니, 더 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다.


가슴 노출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이다.


그럼, 서양, 특히 프랑스에서는 여성의 가슴 노출과 허벅지 노출 중 어느 쪽이 더 섹시하다고 생각할까?


정답은 바로 허벅지 노출이다. 그들은 상의를 훌러덩 벗고 브래지어 차림으로 다녀도 그것을 섹시하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허벅지를 노출했을 때 “오, 너 대담한데?!”라고 한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서양은 여성의 가슴 노출에 관대하다. 그 이유를 서양 예술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프랑스에는 노트르담(성모 마리아) 즉 ‘신성한 어머니’ 개념이 있다. 성모의 가슴은 아기 예수에게 모유를 수유하는 생명의 상징으로써 매우 중요하고도 신성한 부위라고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성의 가슴을 섹시함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성스러움의 대상으로 보는 관습이 있다. 왜 풍만한 가슴이 섹시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회적 통념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예술사적으로,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성모 마리아를 표현하면서 유방을 노골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을 우리가 유심히 관찰해볼 가치가 있다.




다음 3개의 작품을 보자.

좌측 : 그리스 밀로에서 발견된 <비너스> 조각상

중앙 :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마돈나 리타>

우측 : 프랑스 쟝 푸케의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좌측부터 보자면, 너무나도 유명한 <비너스>상이다. 로마 신화에서 ‘비너스(Venus)’는 사랑과 미의 여신이다. 그리스로 넘어오면 ‘아프로디테(Aphrodite)’가 된다.


이 조각상은 그리스의 밀로라는 섬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될 당시, 프랑스군과 터키군이 서로 대치하여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국으로 옮겨온 프랑스군에 따르면, 약탈이 아니라 정식으로 수입했다고 하며, 원래부터 두 팔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밀로 섬 주민들의 증언은 다르다. 프랑스군과 터키군이 이 조각상을 서로 가지려고 싸우다가 좌측 팔이 훼손되었고, 좌우 균형을 맞추기 위해 프랑스 군이 다른 쪽을 일부러 잘랐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진실을 알길 없는 우리로서는 어느 쪽이 참인지 모른다. 하나 프랑스군이 칼로 우측 팔을 잘랐다는 밀로 섬 주민의 증언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들이 무슨 이득이 있다고 거짓말을 꾸며대겠는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이 작품을 직접 보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조형미가 느껴진다. 만약 비너스의 가슴이 옷으로 꼭꼭 숨겨져 있다면 이토록 아름답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팔이 존재하지 않는 것 역시 비너스의 신비로움을 한 층 더 높이는 요소로 보인다. 두 손의 위치가 어디쯤이었을지, 무엇을 가리키고 있었을지, 어떤 행동을 하고 있었을지 등, 관람자가 자신만의 상상을 펼칠 수 있다. 어찌 보면 팔이 없기에 벗겨진 가슴에 더 눈길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중간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마돈나 리타>라는 작품에도 성모가 가슴을 드러내고 아기에게 모유를 수유하고 있다.


우측의 프랑스 르네상스 화가, 쟝 푸케가 그린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라는 제목의 그림에도 성모가 왼쪽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바로 가슴 노출이다. 춘화(春畵)가 아닌 성화(聖畵)일진대, 여성의 가슴이 매우 직접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반대로 하체는 긴 옷으로 모두 가려져 있다.




다음 그림도 한번 보자.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 1830 - 유진 들라크롸(Eugène Delacroix)


이 그림을 그린 예술가는 프랑스의 낭만주의 거장, 유진 들라크롸(Eugène Delacroix, 1798-1863)이다. 영화 다빈치 코드에 나왔던 ‘생 쉴피스 (St. Sulpice)’ 성당 안에도 들라크롸의 작품이 있다. 생 쉴피스 성당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작품은 그가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기념해서 그렸다. 1789년에 발발한 첫 번째 시민혁명은 들라크롸가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그 이후 여러 차례 일어난 시민혁명에도 그가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일각에서는 들라크롸 자신이 시민혁명에 참가하지 못한 게 안타까워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아무튼, 그는 프랑스혁명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이렇게 가슴을 풀어헤친 여성을 그렸다. 이 점이 바로 그의 작품이 역사적으로 정말 중요한 이유이다. 그때까지는, 대부분의 작품 속에 가슴이 노출된 여성은 성모 마리아였다. 그런데 이 작품 속의 여성은 성모도 아니고 비너스와 같은 신도 아닌, 평범한 여성이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등장인물이었다.


게다가 훗날 그림 속의 여성은 프랑스의 여신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안느(Marie-Anne)’의 모델이 된다. 프랑스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안느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한번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왜 들라크롸는 미천해 보이는 한 여성의 가슴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묘사했을까?


많은 평론가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단순히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가슴이 아니라 프랑스를 먹여 살리는, 생명을 상징하는 젖줄이라고들 한다.


이 주제에 대해 조금 더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안토니 베르텔리에 (Anthony Berthelier)라는 허핑턴 포스트 정치부 기자의 기사에 나온 프랑스 성직자들의 발언을 보자.


“공화국의 상징인 마리안느는 사람들에게 젖을 먹여서 기르기 때문에 가슴이 벗겨지고, 그녀는 자유롭기 때문에 가슴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 공화국이다.” ("Marianne, le symbole de la République, elle a le sein nu parce qu'elle nourrit le peuple, elle n'est pas voilée parce qu'elle est libre. C'est ça, la République.")


이 견해는 오래전부터 신부님들과 같은 성직자들이 주로 펼친 견해이다. 성직자가 굳이 이런 해명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의견도 있다.

"마리안느는 우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벌거벗은 가슴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시민들이 공화국에 대해 바라는 이미지일 뿐이지, 여성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은 전혀 아니다!” 말하자면, 여성을 성 상품화하고자 했던 것은 절대 아니라는 의견이다.


이 모든 견해들은 여성의 가슴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바라보는 입장을 무척 잘 명시하고 있다.


또 모를 일이다! 가슴이 드러난 것이 그냥 단순히 화가들이 예로부터 그림을 그려오던 관습이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예술적 코드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옷 속에 감추어져 있던 가슴을 드러내 시민혁명을 표현했다는 것은 «자유 쟁취»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즉, 여성의 가슴은 성적 대상이나 섹시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오히려 '자유'나 '해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래서인지, 프랑스에서는 여성이 심하게 파인 옷을 입거나,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채 유두가 훤히 비치는 옷을 입어도 결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고(故) 설리 같은 연예인의 가슴 노출 건과 노브라 건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구설수에 오른 것은 물론이고 악의적인 댓글과 표적 공격은 결국 그녀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했다. 그게 무슨 별일이라고. 프랑스에서는 아무 문제도 아닌데……. 그녀가 프랑스에만 태어났어도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한동안 마음이 아렸다.


사실, 여성의 가슴 노출이 전혀 섹시하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유럽인들이 그것에 관대하고, 설령 성적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할지언정, 실제로 길거리에서는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므로 눈치껏 각자 조심하는 센스를 발휘해야 한다. 하지만 대놓고 비난하는 일은 절대 없으므로, 그 점에 대해선 비교적 마음을 놓아도 무방하다.


브래지어로 여성의 가슴을 꼭 묶어 놓으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는 의사들의 충고도 있다. 집에서는 반드시 풀어놓고, 밤에 잘 때도 착용하지 않는 걸 권한다. 그래서 나도 집에서는 가슴을 해방시킨다.


아, 물론 외출할 땐 반드시 착용한다. 왜냐면 나는 뽕.브.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흑, 뽕브라에 의존하는 '나', 너무 가식적인가?


브래지어 착용을 의무화하고 가슴이 드러나는 의상을 금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그걸 지키지 않은 사람을 손가락질한다면, 미안하지만 한국은 자유와는 거리가 먼 미성숙한 사회이다.


브래지어라는 걸 애초에 왜 착용하게 됐을까? 고려시대에 자유롭던 여성의 가슴이 왜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마치 못 볼 물건인양 틀어박혀야만 했을까.


모든 면에서 자유와 해방을 외치면서 유독 여성의 가슴에만 속박을 외치는 모순과 집착이 오히려 징그러울 만큼 가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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