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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윤정 Oct 27. 2022

철새의 속삭임

살다 보면 집을 살 때가 있고 팔 때도 있다. 2022년 봄, 내겐 집을 팔아야 할 때다. 지난 십여 년간 살아온 집을 팔려니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조언을 구하니 집을 새집처럼 단장하기 위해 무난한 색으로 깨끗이 페인트 칠할 것을 권했다. 집 안팎을 청소하고 페인팅을 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견적을 받은 후 한 업자를 선정해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필요 없는 물건들은 없애고, 가져갈 짐들은 챙겨 넣고, 벽에 기대어 서 있던 가구는 모두 방 가운데로 몰아 색칠할 벽을 드러내야 했다. 사람이 살아가며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고 흉터가 남듯, 집도 여기저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집에 남긴 이런 생채기처럼, 그동안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준 이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페인트를 시작하기 전에는 눈에 띄는 몇몇 곳에 터치 업 정도만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일을 벌이고 보니 눈에 띄지 않았던 흠들이 곳곳에 드러났다. 언젠가 한국에 다녀온 한 선배가 한국에서 점을 빼고 와서 한 말이 떠올랐다. “학교 후배가 병원을 개업했다고 가서 점을 빼라고 특별히 할인해서 점 하나당 만원에 해 주겠다고 해서 그러자고 했지. 얼굴에 눈에 띄는 점이라곤 뭐 대여섯 개 정도니, 큰돈 안 들겠다 생각했지. 근데 점을 빼고 난 후 청구서 보고 기절할 뻔했어. 점을 수백 개나 뺏다지 뭐야. 내 눈에 보이지 않던 점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거지.”


내 집은 마치 점을 빼기 위해 현미경 앞에 놓인 민낯처럼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 집을 지어 이 집에 들어왔으니 십여 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가구 뒤에 쌓여있던 먼지를 닦아내니 감추어졌던 흠들이 드러났다. 문고리를 얼마나 세게 열어젖혔는지 문 뒤 벽면이 파인 곳도 있고, 새집이 자리를 잡으면서 벽면에 박은 나사들이 튀어나온 곳들도 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그 세월 동안 생긴 흠들이 낱낱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최후 심판의 날을 생각했다. 한평생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삶의 민낯이 온전히 드러나는 그날, 우린 얼마나 많은 상처를 드러낼 것인가.


2층부터 칠하기 시작해 처음 며칠은 지내는 데 큰 불편을 느끼진 못했다. 어차피 낮에 주 생활은 부엌과 거실이 있는 1층에서 이루어지고 밤엔 1층 손님방에서 잤다. 하지만, 1층에 페인팅을 시작하고부터는 내 삶의 공간이 없어졌다. 식사할 테이블도, 앉아 있을 소파도, TV마저 벽에서 떼어내 저녁마다 보는 뉴스도 볼 수 없었다. 모든 생활이 엉망이 되고 보니 전쟁통에 피난민이 된 이들의 절절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최근 뉴스에서 본 우크라이나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자는 전쟁에 남아 싸워야 하니 엄마가 어린아이들을 걸리고 안고 아이들은 자신의 인형이나 고양이, 개를 안고 걸리며 피난길에 나선 이들. 집은 산산이 부서지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 그들의 심정이 어떠할까. 페인팅이 하루속히 끝나기를 기다리며, 일상의 삶이 산산이 무너진 그들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의 삶이 회복되리라는 소망을 잃지 않기를 더 간절히 바라며.


페인터들이 1층과 지하를 칠하는 동안, 페인트가 끝난 이층에 올라와 정돈을 시작했다. 새로 칠해진 벽은 때가 벗겨지고 흠이 덮어져 말끔해졌다. 내 삶도 이렇게 새로워졌으면 하는 바램이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처럼 인다. 방 가운데로 몰아 놓았던 가구를 하나둘 제자리로 옮겨 놓으니 어수선했던 공간이 정돈되어가며, 모든 일에 제때가 있듯 모든 것에 제자리가 있음을 본다. 제때, 제자리를 찾아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창밖에 지저귀는 새들이 “우린 만리 길을 날아 이 봄, 이곳에 날아왔네”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이곳 북버지니아의 5월은 겨울을 나기 위해 멕시코 등 남미로 날아갔던 새들이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찾아 이동해 가는 철새의 계절이다. 


나도 이 봄, 별을 보고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찾아 온 힘을 다해 날갯짓 해 가는 철새처럼, 그렇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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