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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윤정 Oct 27. 2022

별꽃 나물과 쑥떡

봄은 소리로 온다. 돌아온 철새의 종알종알 지저귀는 소리, 얼었던 개울물이 녹으며 졸졸 흐르는 소리, 고드름이 달렸던 지붕 처마에 봄비 내리는 소리. 지구온난화 때문인지, 내가 사는 곳이 어릴 적 한국과 달라서인지, 이제는 좀처럼 얼어붙은 개울물이나 고드름을 볼 수 없지만, 이른 새벽 온갖 새의 우렁찬 노랫소리만은 봄이 왔음을 알린다.


봄은 향으로도 온다. 이름 모를 풀들의 향. 나태주 시인은 ‘풀꽃’에서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라고 했는데 나는 봄풀의 이름과 색을 알지 못했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봄풀이 쑥과 냉이다. 어린 시 절 초등학교 때 친구와 방과 후에 쑥과 냉이를 캐곤 했었다. 1980년대에 아파트 단지가 곳곳에 들어서며 쑥과 냉이를 캐던 곳이 속속히 사라지고 난 후, 친구와 나는 방과 후 만화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이후로 나는 봄의 향을 잊고 지낸 듯하다. 추억이 아련히 남아, 봄이면 그 향이 가슴에서 간혹 피어나곤 한다.


잃어버린 봄의 향기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2021년 4월 마지막 토요일 오전에 락크릭 (Rock Creek) 공원에 있는 볼더 리지 트레일 (Boulder Ridge Trails)을 하이킹한다는 공고 이메일을 받자마자 곧바로 “참석합니다!”라고 답했다. 종종 이런 하이킹을 주선하는 대학 동문은 친절하게 3 마일이 조금 넘는 하이킹 코 스로 두 시간여 정도 걸릴 거란 설명도 해 주었다. 20년 가까이한 직장을 오가며 워싱턴 DC 내에 있는 이 공원 근처를 지나기만 했을 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공원 내 자연관 (Nature Center) 근처 주차장에 들어서니, 저만치 모여 있는 여러 동문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열일곱 명이 둥글게 둘러서 간략히 이름과 학 번, 학과를 나누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그날 산책의 인솔자는 나보다 25년 먼 저 대학을 다니신 강순임 선배님이셨다. 남편도 동문으로 그분의 두 해 선배셨는데, 두 분 모두 건강한 젊음을 유지하고 계셨다. 참석자 중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나보다 연장자셨다. 주차장 옆에서 파릇파릇한 봄 나무를 배경으로 출석 사진을 함께 찍고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동행한 선배님들은 산책로를 따라 각양각색으로 자라 있는 풀을 가리키며 이름을 말했다. 그중에서도 인솔자이신 선배님은 산나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듯했다.


“이건 취나물. 나물해 먹어도 맛있고 쌈 싸 먹어도 되고.” 가장 젊은 동문과 나와 함께 걷던 수연 선배가 놀라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여기 쑥이 있네.” 쑥이라는 말에, 어린 시절 기억이 동했는지 나도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쑥을 보니 내 뒷마당에서 본 듯한 풀이었다.


“어머, 이게 쑥이에요? 저희 집 뒷마당에 있는 걸 잡초인 줄 알고 뽑아버리려 했는데.” 나는 믿기지 않아 되물었다. 수연 선배는 쑥잎 하나를 떼어, 코에 가까 이 대어 향을 확인한 후 내게 건네며 말했다. “향이 이렇게 강한 쑥을 어떻게 구분하지 못하냐?”


아, 나는 어떻게 이 향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을까. 이름도, 모양도 모두 잊고 내 마당에 내가 심지 않은 풀은 모두 잡초라 생각했었다.


올봄, 시간이 날 때면 마당에 나가 겨울 동안 황량해진 뜰을 정리하고 잡초도 눈에 보이는 대로 뽑았다. 잡초 죽이는 약을 뿌리면 그 약이 비에 쓸려 내려가 물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된다 하여 약을 쓰는 것을 포기하고 잡초로 보이는 것 은 뿌리까지 뽑아버렸다. 그러다가 잡초라고 뽑아버리기엔 너무 잘생긴(?) 것들은 이게 자라면 어떤 꽃을 피우나 싶어 몇몇은 남겨 놓았다. 그중 하나가 쑥이었다. 하이킹을 하며, 나는 또한 돌나물과 별꽃 나물도 알게 되었다.


연초록의 작은 잎들이 옆으로 늘어진 풀을 가리키며, 나는 수연 선배에게 물었다. “이건 뭐예요? 제 앞마당 정원 모퉁이에 번져 있기에 잡초인 줄 알고 뽑아냈는데, 잡초 맞나요?” “오, 이건 돌나물이야. 깨끗이 씻어서 생으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다고.” 수연 선배가 답했다.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나는 귀중한 다년초를 알지 못한 채 잡초라고 뽑느라, 식용 화초를 사서 심느라, 허리가 아플 때까지 일을 했는데... 자연을 몰라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했는지!


“이건 뭐예요?” 나는 내 집 차고 바로 옆에서 본 것과 아주 비슷한 초록 풀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어, 그건 별꽃 나물이야. 생으로도 먹고, 나물 해서도 먹을 수 있고. 맛있고 영양도 풍부하대.” 선배는 산나물의 모든 맛을 떠올리며 매우 즐거운 듯했다. “별꽃이요? 이름이 아주 예쁘네요.” 나는 그 풀이 왜 별꽃이 라고 불리는지 궁금해하며 말했다.


“작은 하얀 꽃이 보여? 고개를 숙이고 자세히 살펴봐야 해. 넌 키가 커서 그렇게 서서 내려다보면 꽃이 너무 작아서 보이질 않아. 별처럼 생긴 하얀 꽃의 모양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니까.” 선배는 덧붙였다. 해박한 선배와 동행하는 것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생각하며 감사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 내 마당에 남겨진 풀을 돌아보았다. 연초록빛이 너무 싱그러워 차마 다 베어내지 못했던 풀이 돌나물, 차고 바로 옆에 번진 풀은 하얀 별 모양의 꽃을 피우고 있는 별꽃이었다. 시간이 없어 다 뽑아내지 않고 남겨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어린아이처럼 쪼그리고 앉아 별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하얀 꽃이 너무나 작아서 서서 바라볼 때는 초록 잎에 둘러 싸여 있는 줄 도 몰랐다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하얀 별꽃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정말 옳았다. 식물도감 앱에서 이 별꽃은 다년생 허브의 한 종류로 샐러드로 먹을 수 있다 했는데, 혹시나 생것으로 먹어 탈이 날까 싶어 나는 한국식 나물로 만들었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후 간장, 참기름, 깨소금만 넣어 무쳤는데 깔끔한 나물 맛이 났다.


내친김에 뒷마당에서 쑥을 잘라 왔다. 마침 그 이튿날이 결혼 25주년인 날이라 기념 쑥떡을 만들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요리법을 찾았다. 찹쌀을 두 시간 물에 불렸다가,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고, 잘게 자른 쑥과 함께 압력밥솥에 넣고 밥이 되길 기다렸다. 밥이 완성된 후, 밥솥 뚜껑을 여니 쑥의 향이 훅하고 올라왔다. 절구와 절구통이 없으니, 밥솥을 절구통으로, 빵 만드는 막대를 절구로, 다 된 밥을 뒤집어가며 방아 찧은 후 콩고물을 입히니 완성이었다. 어릴 적 한국에서 떡을 만들려면 엄마가 쌀을 들고 방앗간에 다녀오시고 무언가 일이 많았던 것 같은데 이렇게 쉽게 떡이 완성될 줄이야.


열린 창으로 늦은 오후의 비스듬한 햇빛이 미풍과 함께 들어온다. 바람에 실려 온 싱그러운 공기와 햇살이 내 뺨을 스치며 왈츠를 춘다. 봄 향기 가득한 별꽃 나물과 쑥떡을 앞에 놓고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왈츠’를 틀었다. 바이올린 선율의 경쾌한 소리와 봄의 향기가 사뿐사뿐 춤을 춘다.


(2021년 워싱턴 문학 제24호에 수록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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