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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윤정 Oct 28. 2022

홀로 떠난 여행

간혹 미국에서 “나이 더 들면 한국에 가서 살 건가요?” 혹은 “죽으면 한국에 묻히고 싶으세요?”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나는 번번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글쎄요”라며 얼버무린다. “난 죽으면 한국에 있는 어머니 산소 옆에 묻히고 싶어요. 살아 계실 때 함께 오랜 시간을 나누지 못해 그렇게라도 곁에 있고 싶어요.” 미국에 사는 한 지인은 너무나 분명하게 말한다. 또 어떤 분은 당신의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신 후 종종 집에서 없어지셨는데 찾아 나서면 어머니는 영락없이 친정집 방향으로 걸어가고 계셨다고 해서 가슴이 뭉클했었다. 

<귀소본능 (The Homing Instinct)>을 쓴 곤충·동물 생리학자이자 자연주의자인 베른트 하인리히는 여러 생물들이 출산이나 죽음과 같은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그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곳으로 돌아가는 신비로운 과정을 관찰했다. 그렇게 귀소본능에 이끌린 듯, 코비드로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사태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마자 홀연히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한 달여의 시간을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보낼 수 있는 건 성인이 된 후 내 삶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에서 곳곳을 다니며 오래전 보았던 영화 <욕망의 날개 (Wings of Desire)> 생각이 났다. 천사가 이 땅에 내려와 살고 싶어 하는 곳이 있을까? “‘지금’을 느끼고 싶어.” 영화 속에서, 영원한 영적인 존재인 한 천사가 인간의 도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영화는 인간의 일상 삶을 기록하는 업무를 맡은 두 천사 중 하나인 다미엘 (Damiel)이 그 동료에게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되길 원한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흑백으로 나타나는 두 천사의 모습에서 다미엘이 인간의 삶에 대해 얘기하며 색채가 더해진다. 

유한하기 때문에 역동적인 인간의 삶. 다미엘과 같은 천사가 있다면 분명 한국에서 인간이 되길 원했으리라. 한국을 방문해 놀라움을 연발하며 한 생각이다. 어린 시절 처음 놀이동산에 가 신기함에 입을 못 닫고 두리번거리던 아이가 된 듯했다. 내가 나고 자란 한국을 1999년에 떠나 이십여 년간 몇 번의 방문을 했지만 모두 바쁜 일정에 쫓겨 한 번도 자세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미국에서 사는 이민 1세대 어른들이 가을이면 한국 단풍과 가을 하늘이 일품이라고 하는 이때를 맞춰 작정하고 한국을 찾았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예쁘다고 한 들꽃처럼, 구석구석을 둘러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첫 번째로 놀란 것은 곳곳에 만들어진 산책길이다.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 청계천에 가게 되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랄 때 내가 보았던 콘크리트 다리가 코끼리 다리의 열 배도 넘을 고가 도로와 그 아래 지저분하고 혼잡했던 풍경은 사라졌다. 청계천엔 콘크리트로 뒤덮였던 개천이 모습을 드러내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개울물 옆으로 녹음이 우거진 산책로가 있고 물가를 따라 고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서울역에서 충무로를 잇던 고가는 갖가지 나무와 화초가 조성된 서울로 7017이 들어섰다. 서울 도심뿐 아니라 주거 단지 곳곳에 나무와 화초가 우거진 멋스러운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다음으론,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갔다. 1990년대 내가 대학생 때 종종 가곤 했던 곳이다. 이젠 1천3백만 권 이상의 책을 소장하고, 별도로 디지털도서관 빌딩도 있다. 이 디지털 빌딩은 1억 1천6백만이 넘는 디지털 콘텐츠와 25만이 넘는 비디오 자료, UCC 프로덕션 스튜디오, 멀티스크린 영화관과 하이테크 회의실까지 갖춘 곳이다. 또한 북카페와 편의점, 식당까지 갖추고 있었는데, 식당에서 5천 원짜리 식권을 사서 밥과 국, 샐러드, 고기와 야채 반찬 등 영양을 골고루 갖춘,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공간의 변화만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가을볕이 날카로운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사거리 신호등에 섰을 때 넓게 펼쳐진 거리의 우산 아래 그늘진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나, 누가 이런 섬세한 배려를 생각했을까? 생태계를 잃어 사라져 가는 벌을 살리기 위해 도심 속 빌딩 옥상에 벌 키우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KB국민은행의 신문광고에서 성숙한 기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TV엔 2050년까지 탄소 넷 제로를 실현하기 위해 지구 온도 1도가 높아지면 일어나는 재앙들을 공감할 수 있게 담은 공익광고도 나온다. 마구 쓰레기를 내 다 버리고도 무감각한 미국과 얼마나 다른가!

또한, 곳곳에 축제와 이벤트는 얼마나 많은지. 워싱턴 문인회의 한 친구가 가을에 열리는 전주세계소리축제를 강추해 전주에 갔다. 판소리 춘향가 공연엔 무대 양옆에 설치된 커다란 모니터를 통해 창소리의 영어 번역도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는데, 내 옆자리에 앉은 금발 남성은 고개를 끄떡이며 손뼉을 치곤 했다. 이 축제 외에도 한옥타운엔 문화재 야행 축제가 열렸는데,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御眞 어진)를 모신 건물로 국보로 지정된 경기전엔 많은 외국인이 한복을 차려입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 달 여로 한정된 시간의 한국 방문. 날마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놀라워하는 나를 보고 시누이가 말했다. “난 날마다 그날이 그날 같은데… 요즘 제주도 한 달 살기 같은 TV 프로그램처럼 나도 내가 사는 곳에서 한 달 사기 뭐 이렇게 살아볼까?” 내 막내 또래 MZ세대에겐 한정판 마케팅이 유행이다. 한정된 수량, 장소, 시간 동안만 판매해 희소성의 가치를 높인 것이다. 우리 삶이야말로 단 한 번 뿐이고, 한정된 장소에서, 한정된 시간 동안만 주어진 것이다. “그대들 자신이 그대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그만큼 그대들의 삶에는 의미가 담겨 있다네.” 헤세가 한 젊은이에게 썼다는 글귀를 되새기며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발견과 재발견, 그에 따른 놀라움과 기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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