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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윤정 Jun 19. 2023

꽃보다 사람

때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난다. 오늘은 2022년 1월에 내가 만난, 그런 두 흑인 남자에 대해 얘기를 하려 한다. 아주 잠시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그들의 삶이 제2의 사춘기를 지나는 내게 꽃보다 진한 향기로 남았다. 1월 6일 향년 95세로 세상을 떠난 영화배우 시드니 포이티어 경(Sir Sidney Poitier)과 1월 19일 74세로 세상을 떠난 패션계 거물 안드레 리언 탤리(André Leon Talley)이다. 어려서 영화를 꽤 좋아했고, 한때는 패션 디자이너가 될까 싶어 패션 디자인 코스를 잠시 밟기도 했던 나였지만, 한 번도 이 둘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이 분야에 관심이 있었지만 정보가 제한돼 있었고, 미국에 온 후론 살기 바빠 영화나 패션은 내 관심 밖의 세상이었다.

시드니 포이티어는 1927년에 가난한 바하마 출신 부모의 7남매 중 막내로 예정일보다 3개월이나 앞서 조숙아로 태어났다. 부모는 바하마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농작물을 팔러 마이애미를 오가곤 했는데, 마이애미에 와서 예상치 않게 그를 조산한 후 그를 살리기 위해 마이애미에서 3개월을 머물렀다. 그가 살 수 있을지 두려워하는 그의 어머니에게 간호사는 “걱정 말아요. 그는 살아서 왕과 왕비를 만나는 멋진 삶을 살 거예요.”라고 격려를 해 주었다 한다. “그 말이 주술이 되었는지 저는 정말 왕과 왕비를 만난 멋진 삶을 살았어요.” 한 인터뷰에서 지긋한 나이의 그는 우아하면서도 격조 있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삶이 평탄했던 건 아니지요?” 인터뷰 기자가 묻자 그는 회상에 잠긴 듯 답했다. “전 바하마에서 열다섯까지 자랐는데 학교는 2년밖에 다니지 않아 글을 제대로 못 읽었죠. 열여섯 되는 해 부모님이 절 마이애미에 있는 큰 형에게 보냈는데 전 마이애미가 싫었어요. 그곳에선 흑인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죠. 무작정 뉴욕으로 영화배우가 되리라 올라왔는데…”

“글도 못 읽고 바하마에서 자라 심한 악센트가 있는 영어로 어떻게 영화배우가 될 생각을 했어요?!” 인터뷰 기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그는 함박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요. 첫 오디션에 가서 더듬더듬 읽자 ‘이런 데 와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서 접시나 닦아라’는 말을 들었죠. 그 후 정말 어느 식당에서 접시닦이 일을 하며 지냈는데, 어느 날 한 유대인 매니저가 제게 신문을 가리키며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 물었죠. 저는 그에게 ‘전 글을 잘 못 읽어서 신문을 읽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고 했죠. 그러자 그는 ‘네가 원하면 매일 일 끝난 뒤 너와 함께 신문을 읽어주겠다'라고 제안했어요. 그 덕분에 전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다시 영화배우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죠.”

그는 1964년에 흑인 배우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1974년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아 ‘경’으로 불리게 되었고,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주일본 바하마 대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2009년엔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다. 

안드레 리언 탤리는 1948년 워싱턴 D.C. 에서 태어나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외할머니에게 맡겨져 성장했다. 모든 공공기관에서 합법적으로 인종간 분리를 시행한 짐 크로(Jim Crow) 시대에 남부에서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며 그가 겪었을 시련은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보일 듯했다. 패션의 상징 보그(Vogue)지에서 첫 흑인으로 일을 시작해 40년간 편집자로 일하며 영향력을 미쳐온 그는 인생의 조언을 구하는 이에게 말했다 한다. “결코 꿈을 잃지 말고, 숙제를 해야 합니다. (Whenever people ask me for advice, I tell them two things: Never give up on your dreams and do your homework)”

내가 이 둘의 지난 인터뷰를 보게 된 시점이 나의 삶을 영어로 글을 써 많은 이들과 나누겠다는 꿈을 갖고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이런 글을 써서 뭐하나 싶은 회의에 빠져들던 참이었다. 글도 못 읽고 악센트가 심했던 포이티어가 “나도 배우가 되었다"고, 흑인으로 허드렛일이나 하라고 격리된 사회에서 가장 화려한 세계의 패션쇼 맨 앞줄에 앉아 평을 해온 탤리가 “결코 꿈을 잃지 말라”고 내게 말하는 듯했다. 그 둘을 생각하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경쾌한 기타 소리와 함께 외치듯 부르던 노래의 구절이 떠올랐다. 시련에도 비켜서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가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 그런 삶을 그리며, 오랫동안 잊었던 노래를 흥얼거린다. 


미주 한국일보 주말에세이 2022.1.29일 자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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