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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부 Feb 26. 2016

장례식에 참석한다는건.

남은 사람들

대학교 1학년때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돌아가셨다.  임종이 가까워졌다고 생각되었는지 시골에 남아 계시던 할머니가 올라와 계셨고 아빠는 출근하셔서 집안에는 여자들만 남아 있었던 햇살 좋은 4월이었다. 임종하시는 순간, 평소 왠만한 일에는 놀라는 시늉도 하지 않으시는 담대한 할머니가 흥분하셔서는 이리 오라고 소리소리 지르셨지만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벽장에 웅크리고 앉아서 절대로 나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아프시는 동안 내 방을 쓰셨는데 아침에 학교가는 준비를 하다가 방에 뭔가를 가지러 갔을 때 눈을 반쯤 뜨시더니 'what time is it?"이라고 물으셨다. 할아버지는 평양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셨다는데 여자 외국인 선생님한테 영어를 배웠다는 옛날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학생들이 바지춤을 다 올리지 않고(한복바지였다고 한다)  화장실을 나오는 모습이 불편했던지 그 영어선생님은 자주 학생들에게 바지는 화장실에서 다 올리고 나와달라고 부탁을 했었다는 이야기도 하셨었다. 나하고는 마지막 대화를 영어로 시도 하시다가 가셨으니..사실 할아버지가 what time is it? 이라고 물으실 때 나는 잠시 It's almost 9. 이라고 대답해야 하는건가.. 당황했었다. 아니 사실은 정확히 그렇게 대답했었다. 가끔 할아버지가 나한테 영어공부 열심히 하라는 유언을 그렇게 남기신건가? 혼자 웃기도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골에서  친척이자 이웃분들이 올라오셨고 전국에서 친척들이 다 모였다. 마당에도 손님들이 빽빽히 앉아서 술상을 받았고 할아버지 연세가 높으셔서인지 호상이라면서 누구도 슬퍼하는 사람은 없었다. 때가 돼서 곡을 할때에는 눈물 많은 막내 고모가 울었고 우리 엄마가 조금 울었울 뿐 아무도 슬픈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오랫만에 만나는 친척들을 반갑게 맞았고 화환은 골목을 가득 매웠고 집안은 밤에도 낮처럼 환했었다.  


엄마는 부엌을 버리고 손님맞이에 열중이었고 주인잃은 부엌은 고모가 맡아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는데 그릇이 모자란다며 사들인 그릇이 최고급 본차이나 세트였다. 한번쓰고 버리는거보다 좋은거 사서 두고 쓰는게 낫다고 했는데 엄마도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매일 음식이 아니라 음식재료가 도착했고 홍어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시골 친척 아주머니들은 왠종일  부엌에 편안히 자리잡고 앉아서는 소리높여 수다를 떨었고 누군가 도착했다는 전갈이 들어오면 일사불란하게 음식상을 봐서 내놓으셨다. 우리 집은 우리 집이 아니었고 모두의 집이었다. 모든 방문이 열리고 모든 물건이 공용물건이 되었다. 어느 구석에든 누군가가 꼬불쳐져서 자고 있기 일쑤였고 누군가가 흘리고 간 물건들이 쌓였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가셨다. 정작 할아버지는 모르셨지만 만약 살아서 그 장례식에 참석하셨다면 누구보다 즐거워하셨을거라고 생각한다. 고생하던 시절 시누한테 받은 멸시가 서러워 몇십년 인연을 끊고 지내던 할머니의 올케는 이제는 대기업 회장의 어머니가 되셔서 버스만큼 큰 하얀 승용차를 타고 와서 시누이와의 오랜 감정을 씻고 하루밤을 같이 자고 가셨다. 할머니가 정말로 고마워하셨다. 남은 부조금은 형편이 제일 어려운 고모에게 돌아갔고 모두들 잘 치러냈다는 보람을 느꼈던 장례식이었다.


지난주에 작은 아빠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갔었다. 잠깐 인사만 드리고 돌아오려고 했지만 오랜만에 친정쪽 친척들을 만나니 반가워서 하루밤을 자고 왔다. 어려서 방학만 되면 달려가곤 했던 시골 할머니 댁에서 만나 더운 여름을 고무신이나 슬리퍼 끌고 다니며 놀았던 사촌형제들을 다 만나니 감개무량했다. 다들 50가까운 나이가 되어서 누가 더 늙었느니 누가 더 변했느니 얘기를 나누는 일이  즐거웠다. 오랜 지병 끝에 돌아가신 작은 아빠도 할아버지때나 마찬가지로 슬퍼하는 이는 없었고 예식중에만 잠시 눈시울을 적실 뿐 친척이 한 분 한  분 도착할때마다 모두들 반가워하고 안부를 묻고 음식을 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 장례식은 우리 집 대신에 장례식장으로, 최고급 본차이나 그릇 대신에 일회용그릇으로,  음식재료 대신에 어디서 해 왔는지 모르는 완성된 음식으로, 친척아주머니 대신에 상조에서 나온 아주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으로, 밤새내내 화투를 치며 버티던 손님들은 근처 여관에서 푹 잘 수 있게 바뀌었지만 나는 자꾸 할아버지 장례 치르던 생각이 났다.


그 사람들은 다 이렇게 변해 있었다.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던 주인공들은 이제 할아버지 나이가 되었고, 아무것도 모르고 눈 동그랗게 뜨고 사람구경이나 하고 떡이나 집어 먹던  우리들은 이제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놀던 그 만한 나이의 자식을 키우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오랫만에 밖에서 보는 아빠는 걸음걸이가 흔들흔들 힘이 다 빠져보였다. 동생을 보내는 아빠의 마음을 나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런 아빠를 보는 내 마음은 많이 아팠다. 아빠가 오래 오래 살아서 내 곁을 지켜주셨으면 좋겠다. 오빠랑 동생이랑도 만나면 흩어지기 바빴었는데 간만에 일없이 앉아서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우리 다섯식구 살던 그 시절 생각이 났다. 이번 장례식은 나에게는  과거로의 여행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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