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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부 May 20. 2016

애를 왜 낳았냐고  물으신다면.

손익계산을 안 해봐서

결혼은 했는데 애를 낳을 엄두가 안 났다. 주변에 결혼하고 애 낳은 친구가 없어서 실은 본 게 없었다. 그래도 애가 뭔지는 몰랐지만 애를 낳으면 내 인생 종 치는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래서 남편한테 일 이년은 애를 낳지 않겠다고 했다. 남편이 뭐라고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덜컥 임신이 됐다. 몸이 미친 듯이 힘들었다. 누구랑 대화를 하다가도 졸았다 아니 거의 잠들었다. 민망했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7주 정도 돼서 병원에 가는 게 좋겠다고 해서 임신을 확인하고도 좀 기다렸는데, 병원 가기 2-3일 전부터 힘든 증상이 말끔히 없어졌다. 병원에 가니 계류유산이라고 했다. 왜요?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은 아이가 건강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했다. 손윗동서가 몇 번이나 유산을 했는데 습관성 유산이라고 했고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병원에 입원해서 몇 년 만에 겨우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겁이 났다. 일 이년 놀겠다는 계획은 바로 취소됐고 한약을 먹는 등 조바심 내다가 임신을 했다. 그렇게 큰애를 낳았다.


큰애를 친정에서 낳았는데 내가 밤새 애랑 놀고 낮에 자는 동안에는 부모님이 애를 봤다. 내 편한 대로 애를 보다가 한 달 후에 내 집으로 돌아왔는데 애가 밤에 잠을 안 자니 나도 못 잤고 낮동안에는 남편도 챙기고 애 기저귀도 빨고 우유병도 삶느라고 너무 힘들었다. 애는 매일 밤을 꼴딱 새웠다. 아침에 사람들이 출근하고 등교하는걸 보고서야 잠이 들었다.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친정에 가서 한 달을 있는 동안 낮 밤을 바꿔보려고 노력했다. 애가 무지무지 예민했다. 자다가도 금방 깼고 낯가림을 너무 일찍 했고 심하게 했다. 잠들 때는 아빠도 안된다는 식이었으니 누구네 집에 놀러 갈 수도 없었다. 다른 애들이 뒹굴어 노는 동안에도 아들은 나한테 껌딱지로 붙어 있어서 나도, 만나는 사람도 불편해졌다. 그렇게 2돌이 되니 애가 너무 이뻤다. 말을 어찌나 똑똑하게 하는지 아들은 내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고 흉내 냈다. 놀러 와서 하루 밤을 자고 갔던 사촌언니가 무슨 애가 이렇게 말을 잘하나 했더니 하루 종일 떠든다고 했다. 나는 그런 줄도 몰랐다. 언니는 시끄러웠나 모르겠는데 나는 그때 아들이랑 하는 대화가 너무너무 즐거웠다. 5살이 돼서 유치원에 보냈더니 아침에 갈 때는 울면서 갔고 올 때는 웃으면서 왔다. 그러는 사이 둘째가 임신이 됐다. 둘째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절대로 들지 않았는데, 하나만 키워야겠다는 작심이 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일 때 저절로 임신이 됐다. 임신이라고 하니, 그래... 뭐.. 내가 작심을 못하니 알아서 주시는구나.... 했다. 실망이랄 것도 기쁠 것도 없는 그런 임신이었다. 큰애는 임신해서 늘어져 있는 나를 돌봐줬다. 심부름도 해주고 심심하지 않도록 재미도 줬다. 애가 영특해서 한글도 쉽게 떼고 유치원에 가서 노래를 다 외우고 와서는 나한테 불러줬다. 재미있었다.


나는 임신기간 10달 내내 입덧을 한다. 그러니 임신이 정말 힘들다. 얼굴 피부도 다 뒤집어지고 애를 낳고 나면 머리카락이 엄청 빠져서 큰애 때는 멋도 모르고 머리를 길러서 하나로 묶고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 황비홍 같았다. 둘째 때는 살이 많이 찐 것도 아닌데 유달리 몸이 무겁고 힘들었다.


 평소 나는 이미 우리 애들이 다 커버려서인지.. 정부에서 자녀를 낳으면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고 하면, 속으로.. 자기 애 자기가 낳아 키우는 게 무슨 상 받을 일이야??... 했었다. 그런데  애 없이 사는 동네언니가 사는 모습을 보니 자녀를 키우는 건 군대 20번 갔다 오는 것만큼 국가에 봉사하는 일이구나 깨달았다. 게다가 그 자녀가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한다면 그건 훈장감이다. 내 개인이 국가에 그런 봉사를 해야 하는가는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애를 키워본 사람은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거다. 큰애가 고3 때 어느 날부터 자꾸 자기가 대머리가 되는 것 같다고 하는데 무슨 시답잖은 소리냐고 들은 척도 안 했는데 어느 날 머리를 자르러 갔다가 미용사에게 물어봤나 보다. 미용사가 대머리가 그렇게 시작한다고 했단다. 집에 와서 울고불고하는데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애가 몇 달 후면 수능 봐야 하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 인가 싶고, 애가 얼마나 실망이 될까 생각하니 안타까워서 죽을 것 같았다. 남편은 아픈 것도 아니고 머리카락 좀 없다고 무슨 대수냐고 하는데 나는 눈물이 철철 났다. 탈모클리닉에 예약하고 혹시 결과가 안 좋더라도 애가 수험생이니 희망적으로 말해달라 거듭 부탁을 했는데 보시더니 탈모 증후가 전혀 없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병원에 다시 전화해서 좋게 얘기한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그대로 말한 거라고 했다. 그런데도 아들은 믿지 못해서 몇 달 후에 다시 한번 가서 처음에 찍은 사진과 비교해 보고 나서야 안심했다.  남들이 보면 우스운 해프닝이었을 이런 일조차 나는 몇 날 며칠 애간장이 녹았다. 이런 일조차 이러니 진짜 아플 때는 어땠을까.. 짐작이 되시리라. 내 머리가 대신 대머리가 되게 해달 라거나 내가 대신 아프게 해 달라는 기도를 셀 수 없이 많이 했다. 애를 키운다는 건 진짜 맨몸으로 들판에 서서 어디서 어떤 화살이 날아올지 기다리고 있는 심정일 때가 있다.


그런 아들이 오늘 아침 언제든 지진이 난다는 일본에 갔다.

그런 아들이 다음 달에 군대에 간다.

나는 벌써 간장이 다 쫄아붙는다.


애를 낳느라, 키우느라 힘들었다. 지금 와 따져보면 엄청나게 손해 보는 장사 같다.  나는 솔직히 남들처럼 사느라 애를 낳았다. 지금처럼 애를 안 낳는 남들도 많았다면 안 낳았을지도 혹은 하나만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애들을 낳은걸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는 거다. 식상하게 들리겠지만 애들은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애들이 없었다면 내가 대체 어떤 인간이 되어 있을지 상상도 못 하겠다. 낳을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들은 인생에 어떤 보탬이 된다고 애를 낳아야 하는지에 대해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건 다른데 있는 것 같다. 내가 인내심을 배우고 기꺼이 희생을 할 수 있고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너무 사랑해서 애가 타기도 하고 미친 듯이 기뻐질 수 있는 인생 최고의 기회를 놓친다는 것을 해보지 않고 어찌 계산에 넣을 수 있을까?


그들은 절대 모를 거다.

내가 애들을 대체 얼마큼 사랑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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