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가리는 참 흥미로운 사람이다. 어렸을때 로맹가리의 어머니는 아들만 데리고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이민을 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싱글맘이 그것도 이민자로서 아들을 잘 키우는게 쉽지 않은 일이었을테지만 그녀는 끈덕지게 열심히 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았다. 덕분에 총명했던 아들은 좋은 학교에 다니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었다. 외교관으로 오랫동안 봉직했고 미국에 영사로 가 있는 동안에는 영화배우와 결혼도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좋은 책을 많이도 썼다. '하늘의 뿌리'로 콩쿠르상을 탔다.
나는 대학교때 에밀 아자르가 쓴 자기앞의 생이라는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그 이름을 꼭꼭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책을 읽어도 왠만하면 작가이름이나 제목은 기억을 못한다. 아주 인상적인 몇명만 기억한다. 그러려고 그러는건 아니고 기억력이 워낙 형편없어서 그렇다. 하여간 책제목이나 작가이름을 외우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인상적인 책을 한권 읽게 됐는데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단편집이었다. 너무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아서 나는 로맹가리도 꼭꼭 외웠다. 그러다가 나중에 로맹가리가 필명으로 쓴 책이 에밀아자르의 자기앞의 생이라는것을 유서에서 밝히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서 무척 놀랐다. 허걱.. 이런 능력자!! 콩쿠르는 한 작가에게 한번 밖에 안주는 상인데 에밀아자르가 로맹가리인줄 모르고 상을 줬으니 역사이래 콩쿠르상을 두번받은 사람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외교관으로 40대까지 일했으면서 계속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시나리오도 쓰고 영화감독도 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
니체가 초인을 설명하면서 예로 들은 인물중에 몽테뉴와 괴테가 있다. 그 둘의 공통점도 공무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글을 써왔다는 사실인데 로맹가리가 니체 이전 사람이었다면 니체는 분명 그를 초인이라고 불렀을거다.
지금 로맹가리책이 눈에 띄어서 집어 들었는데 옮긴이의 글을 우선 읽었는데 재미있는게 있다. 그러니까 아직 책은 읽지도 않았다. 책제목은 ' 게리쿠퍼여 안녕'.
헤겔이라는 철학자를 아시나? 엄청나게 어려운 소리를 해대는 사람이라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 헤겔이 그랬단다. 인간이란 자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동일한 의식을 가진 타자와의 대결을 통해 절대지식과 자유와 시민사회를 향해 진화하는 존재로 규정된다고. 그 투쟁과 진화과정이 역사라고. 헤겔은 변증법적으로 인간사회내부의 모순을 차츰 없애가고 종국에는 모순이 없어지는 사회가 되는데 그때가 역사의 종말이라고 했단다. 그래서 여태까지 여러명이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가 역사의 종말이라고 했고 다른 누구는 미국이 그렇다고 했단다.
알렉상드르 코제브라는 철학자가 헤겔강의를 해서 헤겔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고 하는데 코제브는 역사의 종말이후 인간에겐 두가지 존재방식뿐이라고 말한다. 하나는 미국식 생활양식의 추구요 다른 하나는일본식 속물주의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연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존재였지만 미국 소비사회는 소비자의 욕구를 즉각 중족시킬 수 있는 물건에 둘러싸여 있고 미디어의 뜻에 따라 유행이 좌우되는사회다. 그러니까 소비주의의 팽배.
역사의 종말이후 인간은 더이상 투쟁할 이유가 없는데도 완전히 형식화된 가치.. 아니 가치보다는 형식을 추구한다. 형식은 거창하고 비장하지만 속은 텅 비어있다.
지금이 헤겔이 말한 역사의 종말 이후라는것은 동의 할 수 없지만 종말 이후 인간을 설명하는 코제브의 이론에는 상당히 공감이 간다. 소비주의와 형식주의. 코제브는 역사의 종말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으로 두가지를 설명했지만 내가 보기에 사회는 지금 거꾸로다. 그러니까 소비주의와 형식주의가 점점 팽배해져서 인간은 더이상 투쟁을 계속해 나갈 의지가 꺾였다.
몽테뉴의 책을 읽다가 소비주의를 한번 쓴 적이 있다. 현대사회의 인간은 물건을 소비하는게 아니고 관념을 소비한다고 했다. 미디어나 광고업자들의 뜻에 따라 우리는 결코 충족할 수 없는 관념들을 소비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소비에 엄청나게 집중하지만 그 혼을 빼는 집중에는 아무런 철학도 투쟁도 없다. 물질만 있다.
형식주의는 아이러니의 극치다. 정신와 형식이 있다. 정신이 형식보다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어느정도의 형식이 어느정도 융통성있게 행해진다. 왜냐면 정신으로 설명이 되니까. 그런데 형식이 정신보다 중시되는 사회가 있다. 이사회에서는 형식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거부할수 있는 여지가 없다. 신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다이아몬드 반지를 준다. 사랑이 중요하다면 신랑이 가난하거나 다른 급한 일에 쓰여질 돈이라는게 설명이 된다. 신부는 사정상 다이아반지를 주지 못한 신랑의 사랑을 의심없이 믿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랑보다 다이아반지가 중요하다면 다이아 반지를 주지 못하는신랑의 사랑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떤 수단을 쓰든 다이아반지를 가져다 주는 방법외에 그 신랑의 사랑을 증명할 다른 방법은 한가지도 없다. 형식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덫'에 옭아매어져 살고 있는거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덫이라는것도 알고 그 모든게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싫어도 그만두지 못한다면, 우리를 분노케하는 것 바깥에서는 절대 살수 없게 되어 벼렸다고 한탄한다면 우리는 냉소주의자다.
나는 지금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개인으로서 매일 매일 소비주의와 형식주의의 비합리성을 경험한다. 그런데 한개인의 힘으로 그 올가미를 벗어던질 힘은 없다. 하루는 내 생활이 참 초라하다고 투덜댄다. 티비에 보여지는 멋진 옷도 없고 차도 없고 식기도 없다고 우울하다. 그러다가 정신차려보면 나는 참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고 불평거리가 하나도 없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흐뭇해하는 순간도 있다. 한편, 타인의 진심을 쉽사리 형식으로 판단한다. 멋진 선물을 주는 사람은 좋은 친구로 너무나 쉽게 받아들인다. 형식바깥에서 진심을 찾기가 쉽지 않다.
참, 로맹가리의 게리쿠퍼여 안녕은 '그렇기에 더욱 형식에 옭아매지는 덫'에 걸린 냉소주의자의 이야기라고 한다.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