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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진희 May 06. 2020

나의 인생 돌아보기

말레이시아에 적응하기 - 10세에서 14세까지 (PART 7)

꽤 큰 면적의 도시 조호르 바루로 이사 간 나는 1925년에 가톨릭 수녀들이 세운 Holy Infant Jesus Convent School이라는 유서 있는 현지 중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침부터 성당처럼 모두 모여서 미사로 시작하는 이 학교는 여학교에다 꽤 엄격한 규범이 있었다. 학교 청소는 물론 정리정돈까지 학생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관습도 있었고 학기마다 무대에 올려지는 연극이나 공연의 남자 역할도 모두 여학생들이 했다. 여학생들이라 그런지 정말 다들 내로라하는 공붓벌레들이었고 경쟁도 치열했다. 말레이시아에 겨우 적응한 지 얼마 안 돼서 이런 학교로 전학 가니, 또 이사를 가기 전까지 나는 꼴찌를 겨우 면하는 정도였다. 큭.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내 기억에 조호르 바루는 쿠알라룸푸르보다 집들도 크고 길도 넓고 공원도 숨은 맛집도 많았다. 다만 촘촘하게 볼 곳 놀 곳이 많던 쿠알라룸푸르와는 다르게 심심하달까? 장점은 이곳이 말레이시아 남부 끝자락에 있는 도시여서 다리만 건너면 바로 싱가포르에 진입 가능한데, 이때 당시 나는 차를 타고 가족과 함께 싱가포르를 처음 구경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관계도 꽤 흥미로웠다. 가깝지만 경쟁심이 강한 형제 같은 느낌이랄까? 한때 말레이시아 반도의 일부로 흡수했다가 싱가포르를 내쳤던 말레이시아, 그리고 홀로서기에 성공해 지금은 아시아의 강국 중 하나로 우뚝 선 싱가포르 사이엔 묘한 긴장감? 이 가끔 흐른다. 땅값도 싸고 생필품도 저렴한 편이어서 싱가포르 사람들은 말레이시아로 와서 신나게 쇼핑을 하고, 특별한 날엔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싱가포르로 건너가서 비싼 휴가를 즐기는 듯하다. 나도 처음 싱가포르에 갔을 때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오차드 로드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었다. 특히, 에어컨이 빵빵한 건물들을 오갈 수 있어서 연말엔 겨울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시원했고, 무엇보다 말레이시아에 비해서 정말 깨끗했다.


학교 생활은 여전히 고역이었다. 한 번은 바로 옆자리에 앉은 학생과 수학 시험 점수가 똑같이 나왔는데, 이걸 보고 선생님은 우리가 서로 베꼈다고 짐작하시고 두 학생을 수업 중 자리에 세워놓고 문책을 하셨다. 내 말은 전혀 믿을 생각이 없으신 선생님이 정말 밉고 억울했다. 게다가 학생들은 나를 은근히 왕따를 시켰는데, 나만 남겨놓고 모두 교실을 나가서 놀다 오는 동안 나 혼자 반청소를 다하게 만들거나, 제일 무거운 물 양동이를 나르게 하는 등의 괴롭힘이 있었다. 초등학생들과 달리 괴롭히는 방식이 매우 세련됐다고나 할까. 


나 말고 그림 잘 그리는 아이들도 많아서 별로 이득?을 못 봤는데, 대신 학기말 발표행사 때 자발적으로 나서서 독창을 하게 된 후 아이들의 괴롭힘이 조금씩 수그러 들었다. 하지만 공부 수준은 나날이 어렵고 높아져서 점수가 오르지 못했다. 이때도 거의 매일 집에 와서 울곤 했는데,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도착해 샤워할 때마다 들려오던 이슬람 사원의 노랫소리다. 사원에서 하루 다섯 번씩 확성기로 울려 퍼지는 'Azan'이라 불리는 이 노래는 무슬림 성도들에게 기도할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구성진 목소리로 낮은음 높은음을 오가며 차분히 시를 읊듯 부르는 소리가 왠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곤 했다.   


정신없이 공부 말곤 특별히 다른 낙이 없이 보내던 나의 중학교 생활은 아버지의 정체모를 사업이 직원의 횡령으로 망하고 끝이 났는데, 이후부터 싱가포르로 건너가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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