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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진희 Apr 03. 2020

나의 인생 돌아보기

말레이시아에 적응하기 - 10세에서 14세까지 (PART 4)

Sekola Rendah Taman Melawati가 내가 등교한 첫 초등학교 이름이다. 말레이어로 멀라와티 공원 초등학교란 뜻이다. 나라 전체가 지정한 초등학생을 의미하는 짙은 파란색 교복이란 걸 처음 입었고 입학 날엔 아버지가 나와 남동생을 학교에 차로 데려다주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꼬마를 학교에 떨구고 가셨던 아버지 마음은 어땠을까 싶다. 학교에는 정말 외국인이 전. 혀. 없었다. 교감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내가 한국에서 온 신입생이라고 소개하신 것 같은데, 다들 어디? 하는 눈치였다.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서 온 이상한 아이가 등장한 것이다. 갑자기 외계인이 된 느낌이 이런 거군 싶었고 딴 세상에 뚝 떨어진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동시에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고 무서웠다.


학교는 아담한 3층 정도의 빌라 같은 건물이 두세 개 정도 길게 'ㄱ' 또는 'ㄷ' 자로 이어져있는 구조로, 여러 개의 교실로 나눠져 있었다. 대강당, 교내 식당과 실내 운동실, 그리고 나무가 있는 흙마당이 군데군데 있었다. 반마다 담임선생님이 계시고 수업마다 과목별로 이동하는 수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수업도 있었다. 아점에 가까운 점심시간이 있었는데, 내 기억엔 5 Ringgit링깃, 즉 단돈 천 원 정도면 국수, 빵, 과자, 음료수 등 마음대로 충분히 사 먹을 수 있었다. 바삭하게 튀겨낸 요리들이 많았고 국물이 있는 국수나 볶음밥도 있었다. 나는 웬만한 건 다 맛있게 배불리 사 먹었는데, 남동생은 맛없다며 용돈을 거의 쓰지 않았다. 현지 학생들은 정말 조금 먹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왕창 사 먹는 걸 보고 놀라며 구경하기도 했다.  


첫날부터 한 달 가까이 나는 학교 수업 중 아무것도 못 알아들었고 숙제도 전혀 못해갔다. 학교 휴일이란 것도 못 알아들어서 아무도 안 간 학교에 등교했다가 그냥 집에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한국에선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었던 내가 갑자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된 느낌은 참담했다. 거의 매일 집에 와서 울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교감선생님, 영어 선생님, 그리고 아버지가 내준 숙제는 열심히 했다. 교과서를 아무리 봐도 한 줄도 읽을 수가 없는 걸 분통해하면서. 동생은 내가 하는 걸 그대로 따라한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인지 조급해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조금 나이가 있어서였는지, 누나라서 그랬는지, 왠지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그래서 거의 매일 새벽에 모두 자는 조용한 시간에 혼자 탁상 등 하나 켜고 공부를 해서 인지, 첫해 시력이 엄청 나빠졌다. 사진을 보면 첫해 이후부터 나는 안경잡이가 된 모습이다. (근데, 아마도 유전이겠지. 아버지가 안경을 쓰셨으니까. 하하.)


확실히 남동생은 나보다 빨랐다. 언어를 더 쉽게 흡수했고 서슴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공부라기 보단 놀면서 습득한 방법이 더 빠른 것이다. 확실히 스트레스를 덜 받아야 뭐든 빨리 배운다. 나중에 알게 된 바, 10세 정도면 모국어는 이미 자리가 잡았고 이때부턴 다른 외국어를 습득해서   연결다리를 만들 수 있는 시기라고 한다. 여러 개의 언어를 서로 연결하는 다리가 만들어지는 게 훨씬 쉬운 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 최대한 다양한 언어에 노출시켜 주는 것이 좋다. 한국에선 모국어 외 다른 언어에 자연스럽게 노출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외국어 연결 다리를 쉽게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의 시험을 위한 언어 공부는 자연스러운 노출이 아니기 때문에 스트레스 지수만 높이고 언어 습득 자체를 싫어하는 역효과가 나기 쉽다. 이 부분이 참 안타깝다. 모노 컬처 Mono-culture의 약점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현지 초등 5학년에 입학해서 바로 다음 해에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있었다. 그런 점을 아시는지, 아버지는 공부할 때와 놀 때를 잘 만들어주셨다. 숙제를 엄격하게 확인하시고 벌도 주셨지만, 학교를 땡땡이치고 갑자기 가족 모두를 차에 태워 말레이시아 반도 곳곳을 돌아다니는 여행도 자주 했다. 말레이시아는 아름다운 해변과 휴양지가 많은 나라다. 그래서 내가 이곳에서 처음 배운 것 중에 하나가 수영이다. 그것도 아버지가 우리를 그냥 수영장의 수심 깊은 곳에 들여보내고 나서, 숨 쉬려면 몸을 띄우기 위해 발을 구르라는 식의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그 후, 다양한 물, 호수, 강, 그리고 바다에 들어가 놀았다. 각각 물 상태와 흐름이 다르다는 것을 몸소 체험으로 배웠다. 한 번은 멋도 모르고 폭포수 가까이  수영해갔는데, 위에서 퍼붓는 물에 휩쓸려 뚫고 나오지 못했다. 숨이 차오는데 빠져나오질 못해서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다가, 아, 물결을 따라 바닥으로 내려갔다가 반대편을 나오면 되겠다! 하고 있는 힘껏 잠수를 해서 땅바닥을 손으로 치고 반대편으로 나와서 위기를 모면했었다. 나와서 보니 다들 태평하게 도시락을 먹고 있었고 내가 물밑으로 사라졌었다는 것도 몰랐었다. 방금 내가 익사할뻔했다는 얘기를 해줬더니 아이고 똑똑하네, 잘했네, 살았네 뭐 하셨다. 큭.


그 외에도, 어머니 드린다고 두리안 따러가기, 방에서 두꺼비 내쫓기, 도마뱀 잡아 키우기, 버려진 아기 고양이를 주워서 파는 아이한테서 사 오기?, 개 데리고 놀이터 가서 무슬림 아이들 그네에서 내쫓기, 이웃집 철조망을 네트처럼 사이에 두고 배드민턴 치기, 집 앞 컨트리클럽에서 하루 종일 수영하고 테니스 치기, 지붕에 올라간 셔틀콕들 배수구 타고 올라가서 주워오기, 동네 아이스크림 트럭 쫒아가서 하드 사 먹기, 섬에 놀러 가서 해변에 널린 해삼 주워와 초장

찍어먹기, 밤에 배 타고 나가서 손전등으로 오징어 낚시하기, 무더위에 컨트리클럽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땀 뻘뻘 흘리는 산타에게 선물 타 오기, 아버지 차 세차하거나 마당 풀 베고 바나나 파파야 따오기, 등의 장난과 재미난 일을 틈틈이 하면서 열대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일 년이 되어가자 어느새 영어와 말레이어가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반에서 꼴찌 하던 나는 그나마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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