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6
익숙함과 편안함을 버리고 가기, 96일 전익숙함과 편안함을 버리고 가기, 96일 전
6번의 이직 끝에 5년째 현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사실, 그만두기 아까울 정도로 괜찮습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일, 꿈꾸던 일은 아니라 출근이 싫어 월요일이 오는 게 싫어서 일요일 저녁부터 시무룩하지만 막상 출근하면 업무에 있어서는 익숙하고 편안합니다. 대부분 짜인 일정대로 흘러갑니다. 제가 조정할 수 있고요. 오버타임은 없습니다. 예상밖의 상황이나 급박한 상황은 1년에 한 번 정도 있을까 말까 합니다. 그런 상황도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쉽게 해결이 가능한 일들입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모두 친절하고 협조적입니다. 대부분 일적인 이야기 이외에는 잘하지 않고 각자의 영역을 지켜주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기꺼이 서로 도와줄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집에서 지하철로 20분이고요. 근처에 아름다운 공원도 있습니다. 물론, 여느 직장인처럼 스트레스는 있지만요.
떠나려 합니다. 익숙함과 편안함 속에서도 느끼는 갈증을 해결해 보려 합니다. 요즘 들어 사람마다 '때'라는 게 있는 거 같습니다. 글 쓰는 게 너무나 재밌고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지금, 그럴 '때'인가 싶습니다. 이전에도 글을 쓰긴 쓰지만 조급했습니다. 생계의 압박과 현실적인 문제가 있는 이상 나의 글은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고 때 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즐겁게 몰입해서 쓰다가도 이게 돈이 될까...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던 때였지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만 커가고 이건 제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었지요. 그렇게 제 꿈은 쓰다가 만 노트 수십 권에 나누어져 이사할 때 버려졌습니다.
혹시 저와 같은 가난한 몽상가인 분들이 있다면 전 감히 '현실을 집중해서 살아보라'라고 권유드리고 싶습니다. 이도저도 아닌 삶 속에서 방황도 경험이고, 소비도 경험이라 합리화했던 그런 삶 속에서 다양한 사건과 감정을 겪으면 남은 것은 있었지만, 그래도 바짝! 집중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훌훌 털고 자유로운 저로 살았으면 어땠을까, 지금 이렇게 글을 재밌게 쓰는 순간이 더 빨리 오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가 듭니다. 정답은 없지만, 현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의 환경이기에 편안히 나를 드러내고 이렇게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환경이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기회가 오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그래서 지금이다, 싶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려 하는 겁니다.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었던 '간호사'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을 때가 다가오네요.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에 서울 대형병원 간호사인 저는 가족의 '희망'이었고, 꿈보다는 취업을 해서 보탬이 돼야 했던 것이 대학교 막 졸업한 저의 현실이었기도 했지요. 간호사가 아니었다면, 아무런 '기대'도 안 받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가끔씩 하기도 합니다. 자기변명일 수도 있겠네요.
퇴사하고 떠난 후에는 이제 "이전에 간호사였어요"라고 말하겠지요. 저 지금, 과거형으로 저 문장을 쓰는데 아쉬움보다는 해방감과 짜릿함이 드는 건 왜일까요.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퇴사 후에는 간호사일 때보다 소개가 조금 길어질 것 같네요. "지금은 남편과 자유롭게 여행중이에요. 작가이자 크리에이터로 살고 있습니다" 소개할 날이 오겠죠.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고 난 뒤에는 "작가이자 크리에이터입니다" 한마디로 끝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 진짜 업이고 아이덴티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