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9
3년의 임상 간호사를 끝으로 '간호사'라는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싶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그 직업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일단, 혼자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혼자서 낯선 곳을 다니는 것만큼 자유롭고 짜릿한 건 없었습니다.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습니다. 한인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에서 일하며 먹고살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발목에 단단히 묶여 있는 '천륜'의 끈과 그때는 내 삶의 한줄기 '빛'이라 여겼던 심리상담공부가 남긴 '빚'은 다시 저를 불러들여 일하게 했습니다. 해야 했지요. 그때 제 손에 쥐어져 있던 건 '간호사 자격증' 뿐이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당장 필요한 만큼의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임상 간호사'는 죽어도 하기 싫어 다른 업무를 찾아보다가 '연구간호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연봉은 적더라도 상근직을 원했고, 인계라는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연구간호사직은 대부분 서울에 있었고 다시 그렇게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다시 신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업무에 대부분 혼자서 해내야 하는 일이라 겨드랑이가 흠뻑 젖어가면서 긴장한 상태로 일하다가도 제시간에 퇴근이 가능했습니다. 해외에서 연구자미팅을 할 때면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영국으로 갔던 적도 있고요. 동호회 활동도 할 여유가 생겼고, 거기에 현 남편을 만나게도 되었지요. 이전 직장에 비해 만족스러웠고 삶은 평온한 듯 흘러갔지만, 마이너스 잔고에서 플러스가 되는 건 아득히 멀기만 했었습니다.
일이 힘들다는 핑계로 불필요한 소비를 하면서 지냈고, 불안정한 직업과 수입을 가진 부모님을 위해 생활비를 월급의 반 정도는 매달 보냈었지요. 망가진, 아니 애초에 없었던 경제관념 탓에 잘 쓸 줄도 잘 모을 줄도 모른 채로 산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나를 위한 투자라 생각하며 비싼 필라테스나 피부관리를 1년 치를 할부로 과감히 끊었고 (꾸준히 가지도 않았습니다. 아까워라...) 서울의 각종 페스티벌, 콘서트에 찾아다녔지요. 그러다가,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찾아오는 공허감의 원인을 찾기 위해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했었고 거진 3000만 원 이상을 썼습니다(사실 더 될 수도 있습니다...). 학자금 대출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부모님께서 자립하시길 원한 마음을 담아 드린 생활비는 오히려 부모님을 더 저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무능력하게만 만들어, 밑 빠진 독에 물붓는 셈 되었지요.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마이너스 잔고는 저를 탐색할 시간과 자유를 그리고 여유를 갉아먹고 조급함 속에 살게 했습니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겠다고 가성비를 따지는 소소한 도전을 했지만 조급함으로 인한 빠른 포기를 했고, 그로 인한 자신감은 고갈되고 말지요. 한참 이 패턴 속에 놓이게 됩니다.
서울에는 놀 것도 많고 도전할 것도 많지만, 마이너스 잔고상태에서는 애증만 쌓여 갔습니다. 그렇게 다시 불안정함을 안고 일하게 했지요. 다시 서울에 올라온 이후 , 5번의 이직은 이때의 저를 대신하는 프로필입니다. 이게 과거의 저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나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상담가'를 꿈꿨지요. 도대체 무슨 심리상담 공부를 하는데 돈이 많이 들었나라고 물어보신다면 아직 그것까지는 밝힐 만큼의 용기가 없습니다. (사이비 집단은 아닙니다) 거기에 선생님들 모두 정신을 공부하고 탐구하는 사람이었고 자격증 또한 갖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었지요. 분명 그때는 저에게 도움이 되었고, 그 모임 안에서 많이 울고 웃으면서 저를 찾아가긴 했으니까요. 그곳을 거치지 않았다면 저는 어땠을지는 사실 상상이 안 갑니다.
시간이 흐르고 결혼이라는 걸 생각하고, 경제관념이 바로 서면서 제가 했던 일이 얼마나 나의 자유를 더 억압했는가, 하고 싶은 걸 한다면서 인풋 대비 아웃풋이 미비한 그 일을 왜 했는가,라고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인정'받기 위해 그랬었던 거 같습니다. '간호사'가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는 저에게 '나를 찾는 일'을 기꺼이 이렇게 겪고 나면 '타인을 알아차리게 하고 일깨워주는' 그런 선구자적인 일을 하면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방법이 틀렸다기보다는, 그건 저와 맞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저의 상황, 경제적 상황에 있어서 그건 우선순위가 돼서는 안되었습니다. 마음의 위로와 안식보다 중요한 현실을 회피하고 있었다는 걸 아주 나중에서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후회'가 나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인생 후회해서 뭐 하느냐,그 시간조차 낭비라 여겼죠. 그런 저도 나이가 들면서, 결혼을 하면서, 가정을 꾸리면서 '후회'가 삐죽삐죽 솟아납니다. 그리고 그 후회는 오히려 반갑고 좋습니다. 인생의 1 phase 넘어온 느낌입니다. 그저 앞만 보고 가는 게 맞다고 여겼던 저였는데, 후회 가득 묻은 글들을 보면서 '변화'와 '성장'을 느낍니다.
어느샌가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면 성장이 없다고 생각이 들었고, 과거의 좋은 점, 나쁜 점 모두 인정하는 중에 생기는 게 '후회'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후회는 그때의 내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 과정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분리 없이 통합하면서 성숙하는 과정이라는걸 알게 됐습니다.
문득 사람들은 이 '후회'를 하기 싫어서 '변화'를 택하지 않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독립, 연애, 결혼, 출산, 육아, 이직 등등 이벤트들을 거치고 난 후 '그때가 좋았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을 하기 싫어서 말이죠. 삶은 뒤로 되감기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요. 그러기에 최선의 선택을 하려 애쓰지만, 우리는 늘 이성적이지도 않고 환경과 감정의 영향을 받는 인간이기에 샛길로 조금씩 새는 부족한 선택들을 하기도 하고 반대로 가는 엉뚱한 선택도 하고는 합니다.
늘 노란색으로 살던 나에게 빨간색으로 색칠하는 건 큰 변화이지요. 다시 노란색으로만 살기 힘듭니다. 이미 빨간색과 노란색이 칠해진 나의 인생라인이거든요. 변화는 그렇게 인생라인에 색을 추가해 줍니다. 만약 '후회'하더라도 이미 칠해져 버린 상태이지요. 그럼 그 인생은 망한 걸까요? '빨간색'을 보면서 '아,이때는 이런 색을 칠했어야 했는데... 아쉽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나에게 맞는 색은 이거였구나', '이 때는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삶의 이정표같이 생각하는 건 어떨까요.삶이라는 그림을 그릴 때 7색의 크레파스보다 24색, 48색, 72색의 크레파스로 그림을 색칠하는 게 더 풍성하게 되는 게 아닐까요.
'후회'하는 사람은 '인정'하는 사람이고 '인정'하는 사람은 '성장'하는 사람이며 '성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