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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보고 Dec 07. 2023

기록하고, 기억하고, 떠나보내고.

D-85

'뇌'추천 플레이리스트


    저는 평상시 노래를 잘 듣는 편은 아닙니다. 글을 쓸 때도 가사 없는 재즈 음악을 틀어놓습니다. 아예 아무것도 틀어놓지 않고 '타닥 타타다닥' 키보드 소리만 들으면서 쓰기도 합니다(맥북 키감을 사랑합니다). 지금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저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가끔 내 몸에서, 내 기억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습니다. 번뜩하고 떠오르는 게 아니라 슬며시 '페이드인' 돼서 들려옵니다. 현재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내가 느끼는 감각이나 내 분위기를 파악하고 뇌에서 추천음악을 재생시켜 주는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뇌추천 플리'


    저의 '뇌'에서 자주 추천해 주는 음악은 좋아서 하는 밴드의 '길을 잃기 위해서'와 '샤워를 하지요'입니다.


'길을 잃기 위해서' 우린 여행을 떠나네 어떤 얘기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걸어가네
네가 나를 떠난 것도 내가 널 그리워하는 만큼 다시 돌아올 수가 없는 여행을 멀리 떠난 것이네
워워워워 '샤워를 하지요~'외로움이 찾아올 땐 샤워를 하지요.
하얀 거품 그 거품 속에 하루를 잊지요~
욕실 안을 가득 채운 나의 18번~이게 바로 나만을 위로가 아닐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불안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유쾌하게 풀어낸 곡들입니다. 이 노래가 들려올 때면, 반대로 저를 알아차리기도 합니다. 지금 길을 잃은 기분이구나, 지금 외롭구나,라고 말이죠. 그렇습니다. 자주 길을 잃고, 자주 외롭습니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최근에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추천해 주더군요. 3년 전 '싱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경연노래 중 하나로 접하게 된 노래입니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최근에 듣지도 않은 이 노래가 대체 왜 내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걸까,라고 말이죠.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 안에 가득한데 이렇게 홀로 누워 천장을 보니 눈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
잊으려 돌아 누운 내 눈가에 말없이 흐르는 이슬방울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 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창 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 보다 커진 내 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떠나기 전에, 지금까지 내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요즘, 과거에 잠시 머물다 올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잊고만 살았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학창 시절부터 저와 맺었던 인연들, 친구들이 떠오릅니다. 저번주에 뭘 먹은 지는 '사진첩'을 들여다봐야 아는데, 몇십 년 전 친구들의 ㄱ얼굴, 표정, 말투, 웃음소리는 왜 이리 생생하게 잘 기억나는 걸까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 학년이 지나면 친구가 바뀌었습니다.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또 친구가 생겼으니까요. 그렇게 같은 반, 댄스동아리, 학원, 성당 다양한 모임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내가 활동하는 범위나 주 관심사가 바뀌면 친구 또한 바뀌었습니다. 같이 있는 공간, 순간에는 최선을 다하되 제 상태가 변화할 때면 큰 고민 없이 멀어지고 결국은 차단해 버리곤 했습니다. 다퉈서도 아니고, 그 친구가 나빠서도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멀어져서,라는 이유였습니다. 저의 바운더리는 참 좁디 좁았었습니다. 여유라고는 없었던 거지요. 두 번째 이유는 저의 말도 안 되는 신념 때문입니다. '과거에 연연하면 안 된다.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과거의 연을 만나는 건 그 속에 머물면서 퇴보하겠다는 거다.'쓰다 보니 어이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친구가 바뀌고 주변이 바뀌는 저에게 '잘하고 있어, 점점 더 좋은 사람, 너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라고 격려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신념을 갖게 된 그 시절 저를, 저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는 미련을 두지 말자' 라며 쿨한 척하고 있는 제가 보입니다. 어찌 보면 맞는 말 같지만, 엉터리입니다. 이 엉터리 신념으로 인해 '과거의 연'이 연락을 올 때도 '과거에 얽매일 수 없어!'라며 무시하는 지질한 제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과거의 저를 사랑하지 않는 제가 보입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 나를 찾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한 시간에도 순간에 집중하기보다 제 안의 열등감과 인정 욕구와 싸우면서, '내가 빛나지 않을 바에는 누구와도 깊게 사귀지 않겠어' 라며 곁을 내주지 않는 짠내 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는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가사이지만, 저는 사랑하는 연인이 아닌 '과거의 제 자신'과 그 시절 함께했던 '친구들'을 대입시켜 보았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긴 위해서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오면서 그 과거에 속한 모든 사람들도 같이 삭제하려고 하며, 혼자 웅크리고 마음을 닫은 채 살았던 저를 말입니다. 잊어야지만 나아갈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다가도, 가끔 정신이 들 때면 (예전엔 그저 감정기복이 심해서, 울적해서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정신을 차렸을 때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SNS에 스쳐 지나간 인연에 대해 난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나, 이미 지나가버린 후에 내 곁에는 아무도 없네... 거리면서 하소연을 하던 제가 떠오릅니다.  이렇게 앞만 보고 살아가다가도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고, 밤새 고독함에 몸부림치던 이유는 '내가 과거의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잃어버린 그때의 추억과 인연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는 걸 이제야 선명히 알아차립니다.


        사실상 과거를 계속 기억한다는 건 뇌과학적으로 자꾸 퇴화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도 한 번쯤 돌이켜봐야 했습니다. 그때의 나를 말이죠. 그리고 말해야 하겠죠. 그때의 나에게 사랑한다고. 사랑받아 마땅한 나였다고. 그리고 제 기억 속에 생생한 제 곁에 머물렀던 친구들, 저를 기억해 줬던 친구들에게 먼저 용기 내 연락하지 못했던 게, 나를 기억해 보내준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은 게, 바쁘다는 핑계를 댄 게, 아직도 후회되는 일이라고 미안하다고, 그 시절 많이 사랑했다고...전하고 싶습니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뒷부분 가사를 과거의 저와 친구들에게 바칩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맘 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
창 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 보다 커진 내 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 필요 있을까요. 그런 마음으로 살면, 그리움이 더 커지고, 더 과거에 얽매이게 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덧붙여봅니다. 그런 엉터리 신념은 버리고,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살아볼까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기록하고, 기억하고, 떠나보냅니다. 그렇게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지금 인연들을 지키고, 새로운 인연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봅니다.


+ 친구의 의미


    남편의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에 가면 꼭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듯 해맑고 철없는 모습에 같이 어울려 놀다 보면 저까지 학생 때로 돌아간 듯 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그런 모임이 없어서인지 그 느낌이 뭔가 '퇴보'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말이죠. 여러 번 만나면서 느꼈습니다. 이들이 함께 겪어온 시절,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서 단단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다는 걸 말이죠.


    거의 매일 보던 학창 시절보다 턱없이 부족하게 보는 그들이지만, 지역과 직업도 사는 방식도 다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게, 인생의 눈앞에 부딪힌 직접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않습니다만, 고맙고, 미안하고, 안쓰럽고, 슬프고, 화났던 그때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그런 만남을 지속한다는 건, 나를 저장하고 백업해 두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이리저리 휩쓸려 내 형태가 존재가 희미해질 때, 나 자신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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