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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보고 Dec 08. 2023

카운트다운

D-84

55일 남았어!


    동반 퇴사하고 한국을 떠나기 100일 전부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 나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지요. 프로젝트명 '카운트다운'입니다. 

 countdown: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일어나기 전 숫자를 세면서 기다리는 것

    16개의 글이 쌓였습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16일이 지났고, 84일 남았습니다. 이렇게 저는 D-DAY가 며칠이 남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요. 남편은 그런 거에 무신경한 타입입니다. 그랬었습니다. 그렇게 내버려 둘걸 그랬습니다. 제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 구독자가 되면서 제 글을 읽게 되고 자연스레 글 내용에서나 글 소제목 'D-XX'을 통해 퇴사까지 남은 일 수를 인식하게 되었지요. 어제저녁 남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야, 왜 아직도 이렇게나 많이 남았지......" 


       D-100일 되었을 때, 아침에 일어나자 남편에게 '100일 남았다!' 외치면서 기쁨의 재롱잔치를 벌였었습니다. 그때도 남편은 웃으면서 '그렇게 좋아? 그래, 곧 간다.'라고 말하면서 초연한 모습을 보였었습니다. 그런데, 축 가라앉은 채로 저 말을 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 요즘 주말이면 퇴사하고 다시 월요일에는 입사하는 기분이 들어." 


    주마다 입사-퇴사를 한다고 생각해 봅니다. 아... 감정이 널뛰기를 합니다. 감정소모가 너무 심합니다. 괴롭습니다. 지금 남편이 그런 걸 겪고 있는 게 미안하더군요. 모르고 있는 편이 나을 텐데, 그는 나처럼 이런 프로젝트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저 살다 보면 어느새 갈 날이 다가오고, 그걸 기쁘게 맞이하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죠. 저는 어떻게든 남편을 위로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달력 어플을 켜서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시킨 날을 말했죠! 


"자기야! 55일 남았어!"


"뭐가?? 왜 55일이야?" 

남편이 시옷자 눈썹을 만들며 말합니다. 무슨 헛소리냐는 거지요. '수'에 약한 제가 또 뭘 잘못 계산하나 싶었겠지요.

.

"회사 출근하는 날 말이야! 주말이랑 공휴일 빼면 55일이야!" 

말하면서도 엄청 기발하다고 똑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말을 듣고도 시옷자 눈썹이 스르르 풀립니다. 몇 초 후 동그래진 눈과 한 껏 올라간 눈썹을 한 채로 말합니다. 

"아...? 오오 그것밖에 안돼?"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면서 얼굴에 안도감과 행복감이 퍼지는 게 보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더 크게 외쳤습니다. 

"응응! 그러니까 55일밖에 안돼!" 


"그러네, 진짜! 쫌만 더 힘내자!" 

헤실헤실 웃음까지 더해진 남편의 말,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필멸자와 숫자


    그렇게 짧은 대화는 끝이 났고, 오늘 남편은 축 처진 어깨를 펴고 출근을 했지요. 85일의 기다림보다는 30일이나 줄어든 55일의 기다림을 품은 채 말입니다. 


    이후에 몇 가지 생각이 맴돌더군요. 


- 100일 전을 기뻐하던 우리가 있고, 85일 전이라 괴로워하는 우리가 있고, 55일밖에 안 남았다며 다시 신나 하는 우리가 있고... 오늘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남은 숫자를 보면서 어떤 마음을 품게 될까. 숫자 하나에 이렇게 오락가락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간절하다는 거겠지. 


- '떠난다'라고 마음먹으니 지금 다니는 직장이 그저 버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구나, 그런 곳에 참 오래도 너와 나의 시간을 녹이고 있었구나. 떠나기로 결정하길 참 잘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결국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죽게 될 '필멸자'인 우리가 시곗 속 숫자에, 달력 속 숫자에, 그 숫자라는 개념에 매달려 사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지만, 그 끝이 언제일지 모르니 무한하게만 느껴질 수 있기에, 그래서 숫자라는 개념을 이용해 하루는 24시간이라는 유한함을, 1년은 365일이라는 유한함을 부여한 걸까. 유한함이 주는 간절함을 이용해, 자신의 소명을 찾고 그것과 100퍼센트 동기화되어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걸까. 유한한 삶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사는 인간, 자칫하면 끝없이 헤매다 '나'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사라져 버릴까 봐 숫자라는, 시간이라는, 장치를 만든 게 아닐까,그럼 이 장치를 잘 활용해야겠다. 난 필멸자니까.


카운트다운 


    로켓을 발사하기 전 준비작업을 철저히 하고 이상이 있는 꼼꼼히 살피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가지요. 만약 한 단계에서라도 이상이 발견되면 자동적으로 카운트다운이 중지되고 발사를 취소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저도 지금 그 작업 중입니다. 첫 번째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기 위해 꼼꼼히 제 자신을 그리고 제 남편을 살피는 중입니다. 카운트다운의 부작용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한함을 설정하면서, 더 깊이 구석구석 살펴보게 되는 장점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에 계속해나가려 합니다. 


    이 카운트다운이 중지되지 않게, 취소되지 않게 같이 응원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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