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8
샴푸, 린스, 바디워시, 퐁퐁, 세탁세제, 섬유탈취제, 두루마리 휴지 등 생필품들이 서서히 다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생필품, 말 그대로 '생활필수품'입니다. 생활하는 데 쓸 수밖에 없는 것들인데 왜 이렇게 사는 게 아까운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대화가 이런 식으로 자꾸만 흘러갑니다.
남편이 말합니다.
" 여보, 퐁퐁이 떨어졌어. 사야겠는데...?"
제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대면서 말합니다.
" 아...... 좀만 더 버티지... 곧 가는데......"
그 말에 남편이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받아칩니다.
"여보... 미안한데... 아직 멀었어... 가기 전까지 사람답게는 살아야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남온 한마디......
"아유~ 사기 싫어어~"
어떻게 더 버티라는 건지 모를 말이지만, 그냥 사기 싫은 마음에 아무 말이나 해봤습니다. 갑자기, 물로만 머리를 감거나, 그릇을 씻거나, 세탁을 할 수 없는데 말이죠. 다 필요한 것들인데도 '떠나는 마당에' 뭘 샀다가 남기게 되면 너무 아깝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그리고 한국에 계속 있는 거면, 여러 개 묶어서 구입하는 게 더 저렴한데, 단품으로 하나씩 사게 돼서 그것도 아깝고요. 뭔가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딱 맞아서 떠나는 날 직전에 생필품이 다 동이 나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까지 생필품 소비를 '사기 싫다'는 생각은 해본 적인 없는데 말이죠. 처음 느낀 저항감에 저 또한 낯설었습니다. 사실, 생필품을 사는 행위가 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뭘 사야 한다는 건 아직 떠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걸 의미하니까, 그게 싫었던 거지요.
인상까지 찡그리면서 싫다고 하는 모습에 남편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제 마음을 알은 건지 웃음을 삼키면서 타이릅니다. 그러면 저는 쿠팡앱을 열고 물건을 클릭하고 결제하면서 또 한 번 외칩니다.
"아유~ 사기 싫어어~" 빨리 떠나고 싶단 뜻입니다.
생필품, 화장품 제외 아무것도 사지 않는 요즘입니다.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가 본 지도 3개월이 지나갑니다. 웹사이트 메인 화면에, 메신저 광고 화면에 뜨는 옷들, 물건들을 보고 '오~이쁜데?', '오~괜찮은데?'라고만 생각하고 클릭도 안 하게 됩니다. 어차피 사면 다 짐이니까요. 저보다 더 징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 남편입니다.
출퇴근을 자전거를 타고 하는 남편입니다. 사계절 내내 말입니다. 겨울에는 목티가 필수지요.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검은색 목티를 안 입고 출근하길래 물어봤습니다.
"여보, 검은색 목티 어디 갔어? 자전거 타고 출근하면 추운데 입어야지."
남편이 머쓱한 표정으로 허전한 목을 쓰다듬으면서 말합니다.
"응? 그거 보풀이 너무 일어나서 버렸어. 오래되기도 했고."
목도리도 답답하다고 안 하면서 목티까지 안 입는다고 하니 뭔 소리인지 싶었습니다. 혼자 극기훈련 중인건가...
"에?? 그럼 어떡해? "
"원래 올해 새로 사려고 했는데, 어차피 갈 건데 뭐 하러 사나 싶어서..."
이 말을 듣자, '맞는 말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게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렇긴 한데...... 기본으로 하나 있어야 되긴 하는데 괜찮겠어?"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필 우리가 겨울이 없는 나라로 가잖아. 몇 개월 입자고 사기가 그래."
이 말을 듣고 더더욱, 크게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렇긴 하다. 자기, 여러 개 잘 껴입자. 버텨보자. 아자아자"
이 응원이 남편을 따뜻하게 해주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결연한 의지를 보인 남편... 가슴에 품은 사직서를 매서운 바람을 버틸 핫팩으로 생각하고 잘 버텨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자아자!
"어차피 갈 건데~" 소비를 멈추게 하는 마법 같은 문장입니다.
삶도, 인생도 "어차피 떠날 건데~"라고 생각하면 지나치고 과한 욕심을 버리면서 살게 될까요? 인간은 필멸자로서의 삶을 '망각'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삶을 '부정'하다보니 '망각'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차피 떠날 거라 생각하면 정말 내게 필요한 걸 선택할 수 있게 되고, 과한 것은 내려놓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게 되지 않을까요. 저부터 조금씩 그렇게 '필멸자' 모드를 켜놓은 채 살아보도록 해야겠습니다.
지금 신혼 집에 놓인 가구, 옷, 물건들도 처분할 생각으로 한번 싹 살펴보니, 한 번도 쓰지 않은, 한 번도 입지 않은 것들이 많이도 있습니다. 나름 신중히 따져보고 산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설레면서 샀던 신혼가전들 '거거익선'이라는 말에 큰 거로만 샀는데, 좁은 아파트에 넣느라고 기사님들이 고생했는데... 지금의 저희 생활에 비해 과한 거였다는 이제서야 알아차립니다. 정말 '필요한 것'에 비해 너무 많은 걸 '소비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 도시를 정해놓고 떠나는 게 아니라 '정착'하기 전까지는 '유랑'을 하게 되겠지요. 그럴수록 가벼울수록 이동하기 편할 겁니다. 가지는 것보다 비우는 게 더 중요해지겠지요. 기대가 됩니다.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여실히 더 느낄 수 있는 환경이 강제적으로 조성되는 거니까요. 저만의 생활필수품을 발견하고 오겠지요. 나에게 '좋은' 나에게 '필요한' 정말 내 안의 내가 '만족'하는 게 무언지 깨닫고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