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9
색연필 드로잉 독학 중입니다. 스웨덴에 사는 '엘리' 작가님의 그림을 보고 반해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글만 쓰기 허전하기도 하고, 내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글 말고도 또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드로잉'을 배워볼까 해서 수업을 찾아보다가 '색연필 드로잉'을 발견했습니다. 점, 선, 면, 구도, 색 등등 여러가지 요소로 그림이 이루어지는데, 색연필 드로잉은 선보다는 둥그런 면과 색감의 조화가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다양한 색과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저로써는 그런 점이 매력있게 다가왔습니다.
색연필 드로잉은 연하게 연필로 스케치한 후에, 다시 그 선을 지우고 색연필로 다시 선을 그리고 채색하는 작업을 거쳐 완성됩니다. 엄청 섬세하고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그냥 온갖 색을 휘갈기며 쓰는 행위와는 아주 많이 달랐습니다. 오랜만에 HB연필도, 연필 깎기도, 지우개도 써보는 중입니다. 이 일련의 작업들이 순서대로 이루어져야지 깔끔한 그림이 완성됩니다. 몰입을 저절로 하게 되는데 그게 꼭 명상할 때와 같은 느낌을 줍니다. 앉아서 가부좌 틀고 하는 것 말고도 명상의 종류는 참 많은 듯합니다.
수업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사물을 단순화해서 도형으로 보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라보니 주변이, 세상이 참 단순하게 보입니다. 모두 세모, 네모, 동그라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작업을 하다 보니 머릿속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건물과 물건들로 가득 찬 세상을 3가지 도형으로 바라보니 꽤 귀엽게만 느껴집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 정보들도 그렇게 단순화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 동그란 사람, 세모난 사람, 네모난 사람, 네모-세모 섞인 사람...' 그리고 있는 그대로 그냥 그렇게 생긴 사람들로 바라보면 귀엽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엉뚱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으로 너무 힘들고, 아픈 나날을 보낸 적이 많기에... 이런 단순화 작업이 참 재밌고 새로웠습니다.
연한 선으로 스케치해야지만, 지우고 색연필로 칠할 때 자욱이 안 남는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첫 시작에 너무 힘을 줘버리면 나중에 수정도 힘들고 완성했을 때도 그 자욱이 남으니까요. 처음부터 잘하려고 하거나, 조급함에 한 번에 끝내버리려고 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객관화하지 못해서 과신하여 일을 벌이거나...그러면 안되겠구나,라는 생각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저렇게 몇 년째 한 작업을 하는 업계의 고수분들도 차례차례 신중히 해나가는데, 첫술에 배부르길 바라면서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비치며 도전-실패를 반복했던 나날들이 떠올랐습니다. 늘 인생의 플랜 B는 필요하다는 걸 요즘들어 많이 느낍니다, 실수를 하더라도 지우개로 지우고 수정해 나갈 수 있게 기회를 남겨두어야 하는 거지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살짝 힘을 풀고 가볍게 스케치하듯 시작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봅니다.
색연필의 진한 색감을 그대로 표현하려면 꽤 여러 번 꼼꼼하게 칠해줘야 합니다. 이 과정이 손목과 팔목이 꽤 아프더군요. 깔끔하게 칠하기 위해서는 힘조절도 필요합니다. 한 번에 끝내겠다고 힘을 세게 주고 색칠하다 보면 뭔가 그쪽만 움푹 파여 고르게 색이 나질 않더라고요. 이렇게 반복작업과 힘조절은 인생에서 나라는 존재감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쓸 때, 말을 할 때,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 할 때, 그렇게 표현하려 할 때 말입니다. 반복하고 연습하고 조절하고 이 모든 걸 등한시해서는 안된다는 걸 다시금 느꼈습니다.
오늘은 다양한 나무들을 그리고 색칠하는 수업이었습니다.
어떤 장소에 갔을 때, 편안함을 넘어서 내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으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나무가 울창하고 빽빽한 곳에 가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처음 그 느낌이 들었을 때, 그냥 이곳에 계속 있고 싶다는 생각에 울음이 목까지 찼습니다. '내가 현실에서 많이 벗어나고 싶었구나', '많이 힘들었구나'라고만 여겼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런 곳에 가면 내가 온전해지는 기분, 여기 있어야 하는 기분이 들어서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죠. 나는 전생에 '나무'였나 보다,라고 말입니다. (엉뚱하지만 아직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우두커니 그곳에 머물며 먼저 다가가지 않고, 오는 누군가를 막지 않고, 떠나는 누군가를 잡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둬야 잘 자라며 바람이 오면 흔들리고, 계절을 매번 정통으로 맞서면서 모든 변화를 그대로 느끼는 그런 나무 말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나무를 그리면서 나는 어떤 형태의 나무일까? 어떤 나무이고 싶은가? 한 번 고민해 보았습니다. 따스한 봄을 전해주며 사랑 가득 받는 벚꽃나무일 수도, 사계절 푸르른 소나무일수도, 가을이면 색색이 빨갛게 물드는 단풍나무일 수도, 바람이 불 때마다 아련하게 긴 가지를 흩날리는 버드나무일 수도, 기둥이 굵고 든든한 느티나무일 수도, 끝을 모르고 쭉 뻗은 하얗고 고고한 자작나무일 수도... 나무 종류가 참 많네요. 결국, 내가 어떤 종류이건 상관없다는 허무한 결론을 내려봅니다.어떤 종류의 나무이던지 상관없으니 혼자 덩그러니 있기보다는 숲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앞으로 많은 공간을 이동해야 하는 제가 제 마음속 숨 쉴 수 있는 단단한 저만의 숲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 자신이 '숲'이 되어 저와 그리고 남편, 스치는 인연, 함께할 인연에게 쉼이 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고 이 공간, 브런치에 하나하나 제 글을 남기면서 뿌리를 내려 그 하나하나가 나무가 되고, 이 공간은 숲이 되어 제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과 자신의 가슴으로 향하는 길을 마련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긴 여행 끝에 숲 속 근처 집에서 제 친구들(제가 전생에 나무라는 전제하에)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