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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선 Sep 30. 2018

밀레니엄 추석의 기억

아모르 파티


“추석 연휴인데 우리 경춘선을 타고 가평에 가볼까? 호명호수가 좋다던데”


부모님께서 선뜻 그러자고 나서신다. 부모가 되어야할 나이의 이 늙은 어린이는 자녀의 때를 억지로 붙잡고 놓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처음 가보는 상천역에서 내려 호수로 가는 버스를 한참 기다리다 탔다. 그런데 이 버스가 산으로 생각보다 높이 올라간다.

순식간에 저 멀리 아래로 마을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버스는 산자락의 나무들을 닿을락말락 아슬아슬하게 치며 달린다. 버스가 지날 때마다 나무들이 닿아 잎들이 우르륵 떨어지고 나뭇가지가 버스 천장에 닿는 소리가 타다닥난다. 나는 순식간에 홍콩으로 소환된다.



홍콩 전체가 보이는 홍콩의 가장 높은 곳은 피크(Peak)다. 그곳에 올라가기 위해 도심 한 가운데 있는 센트럴 역에서 출발해 산으로 올라가는 15번 버스에 앉아 있는 착각이 들 것 같다.


나에게는 밀레니엄 2000년도의 추석 연휴는 당장 한국을 떠날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달아나 현실과 멀어지고 싶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탈출한 곳이 홍콩이었다. 단체여행으로 소심하게 시작했으나 곧 대범해질 것을 예고한 나의 첫 해외여행. 역마살의 진수를 보여줄 운명의 펌프질 시작이었다.

분자가 자연 분리되듯 나는 관광버스에서 내려 나만의 여행을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함께 여행한 버스 안의 관광객들은 창 밖으로 나를 내다보며 반쯤 일어서서 박수쳤고 나는 혼자 떠났다. 관광 가이드 언니는 홍콩달러를 주며 나중에 갚으라고 나의 자유를 응원하기까지 했다.



홍콩 야경에 등장하는 관광객들에게 인기인 YMCA에는 6인실용 여자 기숙사가 있다. 2층 침대가 3개가 놓여있는 저렴한 도미토리를 숙소로 정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캐서린이라는 캐나다 여자애와 미국인 할머니가 룸메이트였다. 숙소 문을 처음 열고 들어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저녁이 되자 하나 둘 들어와 우리 셋은 각자의 사연을 나누었다.
캐서린은 나를 보자마자 숙소에 있지 말고 멋진 야경과 함께 홍콩에서의 밤을 보내자고 같이 나가자고 했다. 주윤발, 장국영, 왕조현, 성룡이 손바닥 도장을 찍어놓은 스타 에비뉴 앞으로 엽서에서만 보던 홍콩 섬이 내 눈앞에 있다. 여기에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홍콩 컬쳐 아트센터 앞 계단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야경도 보고, 버스킹도 하고 있었다.
캐서린은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고 솔직하게 쏟아냈다. 홍콩에 오기 전에 캐나다에서 교통사고가 크게 났었다고. 임신 중이었는데 뱃속의 아기가 죽고는 약혼자와도 헤어졌단다. 마음을 치유하고자 떠나온 곳이 홍콩이었다며 눈부시게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며 울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홍콩이었다.


나도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이 반짝이고 화려한 곳에 왔는데 나와는 급이 다르게 힘든 캐서린은 왜 하필 홍콩이었을까? 우리의 상황과는 반대인 밝고 기운이 넘치는 곳에 끌렸을까? 나를 화려하게 빛나게 해줄 새 희망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나도 여기에 온 이유를 이야기를 해야할 분위기인데, 도저히 말 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부터 나에겐 비밀이 되었다. 극복과 치유 보다는 없었던 일처럼 세탁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정말 사실로 믿어버리게 되었고 나의 팩트가 되었다. 내 청년기에는 그게 필요했다.
다음날, 캐서린은 캐나다로 돌아갔다. 새 희망을 가지고 다시 살아가겠다면서. 나도 앞날을 위해 뭔가를 발견하고 싶었다. 집에 가면 찍은 사진을 우편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하며 서로의 주소를 교환했다. 홍콩 관광을 위해 나가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미국인 할머니와 만났다. 남자숙소에 머무는 할아버지 그리고 그 옆에는 젊은 한국인 남자와 함께 서있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소개해줄 청년이 있다며 인사를 시켜줬다. 우리는 함께 버스를 타고 몽콕에 갔다. 이런저런 자기소개를 하다 나의 터닝 포인트가 될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꿈인 파일럿이 되기 위해 대한항공 조종 훈련생 면접을 보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랬다. 그 직업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었고 승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알려줬다. 승무원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꿈은 옮기도 한다.
내 힘으로 운명을 개척할 발판이 될 것 같았다. 나를 다른 세상으로 탈출시켜줄 비행기가 내 마음에 쿵하니 불시착 했다. 미래의 파일럿은 그 날 한국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언젠가 Oneday or Someday.. 다시 만나기로 했다.



YMCA에서의 인연을 통해 내 삶의 커넥팅 닷 중 두 점이 생겼다. 내 첫사랑과의 엔딩을 비밀로 묻어버리기로 결정한 것과 승무원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캐서린, 조종훈련생 그들은 모두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몇 주 후 캐나다에서 캐서린의 편지와 사진을 받았다. (나는 몇 년 후, 이 사진과 편지를 항공사 최종 면접에 스크랩하여 보여주게 된다.)그리고 미래의 파일럿에게도 편지와 함께 사진이 왔다. 이때는 사진을 찍으면 꼭 우편으로 보내주던 시절이었다. 그는 대한항공에 합격하여 훈련을 받으러 곧 미국에 간다고 했다.



먼 길을 돌았지만 나도 4년 후 승무원이 되어 두바이로 갔다. 김연아의 휘겨 스케이트로  열풍이 불때였다. 비행이 없는 날, 나는 한국에서 종종 탔던 스케이트가 생각나 두바이에서 아이스 스케이트장을 찾아갔다. 중동에서 스케이트라니 혼자 어색해 하다 점차 적응하여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어떤 동양 남자가 저 멀리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수다를 떨고 있는데 “저기 한국 사람이세요?” 말을 건네며 자기는 대한항공 조종사란다.
두바이까지 비행 와서 관광은 안하고 스케이트장에 왜 온 것일꺼? 중동의 스케이트장에서 만난 두 한국인 모두 특이했다.


“저도 대한항공에 조종사가 된 분 알고 있는데. 이00 씨 요, 혹시 아세요?”
“네 그럼요! 이번 두바이비행에 이부기장과 함께 온 걸요.”

우연히 타인을 통해서 우리의 만남이 다시 연결되어 그는 조종사로 나는 승무원으로 두바이에서 만나게 되었다. 세상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휘몰아치는 다이내믹한 삶을 살아온 우리의 4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인생의 마디마다, 여정의 굵은 줄기마다 마주치곤했다.. 이번이 단지 4번째 만남이지만 인생의 변화를 서로 알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항공사도 한 번 옮겼고 또 몇 년 후 비행을 그만두고 한국에 왔다. 감정을 키워보려고 서로 노력을 해보기도 했으나 특별한 인연인 줄 알면서도 인연이 되질 못했다.

비행하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또다시 비행이 하고 싶어졌다. 질투를 하고 있었다. 비행하는 그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의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은 내게 자극제가 되었다. 내가 결국 다시 승무원이 되어야 할 이유를 전보다 더욱 간절하게 만들었다. 남자를 통해 부귀영화와 행복을 누리기보다 내 스스로 성공해야겠다는 여장부가 되어갔다.


나는 정말 두바이로 가고 말았고 그는 다시 예전처럼 아는 사람으로 잊혀져갔다. 전보다 더 신나고 자유롭게 미련 없이 아싸를 외치며 비행을 했다. 그리고 나의 로망을 깨기 위해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여행을 갔다.

이때부터 스마트폰이 등장하여 카톡이 생겨났다. 나의 프사는 ‘SOUL TRIP, SFO(Sanfrancisco공항의 3Letter 코드)'. 저녁에 관광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카톡이 왔다. 몇 년 만에 이부기장이었다.


“윤선씨, 안녕하세요? 혹시 샌프란시스코예요? 저도 샌프란시스코에 비행 왔는데, 어디세요?”



세상에 샌프란시스코의 대한항공 크루 호텔은 내가 지내고 있는 숙소 바로 옆이었다. 어쩜 우리는 이렇게 넓은 세상 속에서 약속도 없이 자주 마주치는 것일까?


내가 추억에 푹 빠져 헤매는 동안 호명호수에 도착했다. 산길로 오르며 아찔하게 달리던 버스 안으로 나무들이 비추는 햇빛을 아무리 가로막아도 나뭇잎과 가지 사이로 반짝 거리며 내 추억을 만화경처럼 빙그르 펼쳐보여 주었다.

“엄마, 우리 전에 홍콩에 갔을 때 버스 타고 피크(Peak)에 올라간 거 기억나지? 난 오늘 그때가 생각나네.”
요즘 들어 예전의 일들이 오히려 더 생생하게 기억날 때가 있다.
버스, 햇살, 나무가 있는 장소만 다를 뿐. 불어오는 바람에도 나는 언제나 모든 것이 추억으로 연결되어 있는 나의 삶을 사랑하고 있다. 그 추석에는 막연한 행복을 찾아 한국을 떠나려했지만, 올해 추석에는 한국에서 잘 정착하여 가족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낼 것인가에 어느 때보다 집중하고 있다.


매일의 삶이 비행인 것처럼 나는 여전히 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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