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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선 Aug 23. 2019

콜롬보의 서울 키친

스리랑카와 원숭이띠의 디아스포라


카페 알프레드에서 이제는 서울 키친이다.
콜롬보에서 한국 청년이 한식을 만들며 삶과 꿈을 키워왔다.
우리 남매는 이상하게 외국에서 엇갈려 살아간다.
꿈은 옮는다. 열정도 옮는다. 내가 20대와 30대에 외국 항공사 취업을 준비하며 꿈을 이루는 과정을 지켜본 영향일까. 나에게 외국이란 행복의 나라였고 탈출구였다. 동생은 그걸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중동의 항공사 승무원이 되어 멀리 나라를 옮겨 간 이후, 동생은 가족 항공권 혜택을 누리며 두바이를 오가며 나와 해외여행을 자주 함께 다녔다. 그래서인지 내가 두바이에 있는 동안 동생은 자연스럽게 세계로 눈을 돌렸다. 마침내 긴 해외 생활 끝에 귀국하니 동생은 콜롬보로 해외 취업을 했다. 건축 전공자인 동생은 건설 회사의 일이 자신의 주파수와 안 맞음을 알고 인생 설계를 다시 시작했다. 꼼지락꼼지락 하는 자신의 성향과 같이 조금씩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한국에 살기 싫었는지, 그곳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이 눈에 보인다고 했다. 

 동생은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콜롬보 시내의 출근길에 눈여겨보았던 가게가 비어있자 바로 거기에 한국식 토스트 카페를 오픈했다. 그것이 카페 알프레드다.
현지 사람들은 동생 이름이 알프레드라고 알고 있다는데 사실은 카페가 있는 동네의 이름이 Alfred street여서 카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단다.
이참에 영어 이름을 알프레드라고 해볼까 라며 웃는다. 난 왠지 어울린다고 동생의 말에 뭐든지 맞장구를 쳐준다.



카페 알프레드는 콜롬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곳이었다.
5평 작은 카페 알프레드. 직육면체로 뚝뚝 잘라놓은 인절미처럼 생긴 빡빡한 공간이다. 현지인들은 새로 오픈한 토스트 카페에 잘 생긴 젊은 한국 청년이 왔다고 소문이 났단다. 길을 오고 가다 지켜본 현지 사람들이 호기심 보이며 들어온다. 버터향이 가득한 한국의 길거리 토스트 맛을 처음 본 현지인들은 큰 눈을 껌뻑이며 와구적 거리며 먹는다. 콜롬보 동네에서는 신기할 법한 맛있는 풍경이다. 생각해보면 동생은 미각이 발달하여 있는 재료로 음식을 뚝딱뚝딱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같이 자라온 동안 나는 늘 공주 누나였거나 외국에 있었다. 그래서 동생이 엄마의 가사 일들을 돕거나 요리도 자연스럽게 했던 걸까.
 마침내 먼 길을 돌아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거 같아서 다행이었지만, 왜 생활이 불편한 그 나라에서의 삶을 선택했는지 현실적인 대화는 한편에 접어두었다.
문득 나 때문에 동생이 이 나라에 인연이 된 건 아닌지 괜히 요상한 생각이 떨쳐지지 않다.
15년 전이다. 내가 승무원이 되어 처음으로 콜롬보에 비행을 갔다. 원숭이 그림의 티셔츠를 보고 원숭이띠인 동생이 생각나서 샀다. 휴가 때마다 한국에 가서 비행에서 모아 온 각 나라의 선물을 이야기와 함께 챙겨갔다.

10년이 넘은 그 티셔츠를 아직도 갖고 있댄다. 이건 누나가 어디서 사다준 거, 그건 언제 사다준 거라며 다 기억하고 버리지를 않는다고 엄마에게 들은 적이 있다.

휴가를 내어 카페 오픈에 맞추어 동생이 있는 콜롬보에  갔었다. 며칠 같이 카페에 있는 동안 사람들이 꽤 많이 왔다. 나는 동생 가게에 와준 사람들에게 일부러 말을 걸며 시끌벅적하게 분위기를 띄웠다.
동생과 하고 싶은 말이 많으나 테이블 하나 건너 사이로 동생이 음식을 만드는 뒷모습을 헛헛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걸로 대신한다.
왼손잡이라 가위질도 칼도 어찌 저리 어설퍼 보이는지, 안 해보던 일을 처음 하게 된 토스트를 만드는 모습이 짠하다.
나는 금방 눈물이 떨어질 거 같은 마음으로 혼자 끙끙댔다. 그러다 손님이 들어오면 나는 중동에 있는 외국 항공사 승무원 출신답게 인도 계열 승객들을 급 밝은 모습으로 능숙하게 대했다. 동생 가게에 와주는 사람들이 그냥 고마웠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외로울 틈 없이 장사를 바쁘게 해 주기를 바라면 동생의 친구들을 대하듯이 손님들을 맞이했다.
가족과 떨어져 있어도 즐겁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나는 오버다. 동생을 맡기고 떠나는 누나가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하듯. 차라리 외치는 심정이다. 나는 두바이의 밝은 햇살 속에서 사막의 적막함을 느꼈다. 외로운 잡념이 속을 시끄럽게 했고 햇살이 소란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가족이 그리운 적이 많았다. 동생도 여기서 그렇게 지냈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께서는 맞벌이를 하셨다. 엄마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배가 고파져서 어둑해진 주방의 등을 켤까 말까 망설였다. 엄마가 아침 출근 전 우리 둘이 먹을 밥과 반찬들을 냉장고에서 꺼내 먹거나 레인지에 데워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두곤 했었다. 한 번은 라면 국물이 먹고 싶다는 내 말에 처음으로 우리끼리 라면을 먹기로 했다. 동생은 라면 2개 분량보다 물을 많이 넣으면 국물이 많이 생길 줄 알았는지 면이 둥둥 떠다니는 물탕을 만들어버렸다. 난 왜 심통이 났던지 두 명이 겨우 앉아서 머리를 맞대고 쪼그리고 먹어야 하는 파란 플라스틱의 똑딱이 상에 라면을 쏟아부어버렸다.
지금에 와서 예전 일이 생생하게 기억날 때가 있다. 그 시절 동생의 마음이 어땠는지, 난 무어라고 말했고 그 후에 라면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어리고 이기적이었던 그날 일이 스리랑카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 날에 문득 떠올랐다.
저녁 8시에는 공항으로 출발을 해야 한다. 이제 슬슬 가방을 꾸리려고 거실로 나가보니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저무는 태양을 보다가 생각이 났다.
창밖을 보니 쨍하던 열기는 어디 가고 베란다 너머로 인도양이 펼쳐진다.
저녁 하늘은 신비롭게 분홍, 노랑, 보라, 초록색으로 석양과 구름이 뒤섞여 휘날린다. 유럽 어느 미술관에서 주저앉아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던 모네의 수련 그림과 같은 장면이었다. 곧 가야 하는데 내 마음과 안 어울리게 바다와 하늘은 무한대로 여유롭다.

 가게를 잠시 닫아두고 동생과 낮에 시내 구경을 나갔다. 그동안 못다 한 대화를 실컷 나누며 뜨거운 햇살 속을 하염없이 걸었다. 더위를 먹었는지, 아니면 생각보다 고생스러워 보이는 동생의 이 곳 생활을 보고 속상한 채로 먹은 푸드 코트의 현지 음식 때문인지. 난 머리가 아프고 울렁거려 다 토해버렸다.
동생을 혼자 두고 오려니 마음이 켕겨 애써 태연 척했다. 아픈 누나에게 무어라도 먹여 보내야 한다며 주방에 등을 켠다. 그리고는 한국 사람은 역시 밥을 먹어야 한다며 촌스럽게 외국 나와 물갈이를 하는 거냐며 콩나물국을 끓인다.
‘누나, 이것 즘 먹어봐’ 하고 나를 부른다.
동생이 차려준 밥상. 익숙한 느낌이다. 거슬거슬한 현지 쌀로 지어진 밥과 한국에서 가져와 몇 개 안 남아 아껴먹는 김 그리고 따뜻하고 맑은 콩나물국.  수저를 몇 번 뜨다가 속이 안 좋아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동생은 조용히 식탁 위를 치웠다. 난 또 그랬다.
아.. 어린 시절 그때, 내가 라면을 엎어버린 후 동생이 아무 소리 없이 치웠었구나. 어린 시절의 동생으로 돌아갔다. 뒤늦은 미안함에 음이 아파온다. 드디어 3년 만에 카페 알프레드에서 서울 키친이 된다.

동생은 얼마나 주변을 돌아다니며 원하는 가게를 찾았을까. 느리고 꼼꼼한 그가 낯선 외국에서 보금자리가 되어준 작은 분식 카페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떡볶이, 김밥, 비빔밥을 외국에서 만드는 마음은 어땠을까, 그렇게 향수병을 달랬을까? K-pop 한류의 흐름으로 현지인들이 카페 알프레드를 찾았다. 한국식 토스트와 한국의 분식을 알게 해 주고 싶어서 소소한 메뉴로 시작하여 성장을 했다.
얼마 전 콜롬보 시내의 테러사건이 있었다. 외국인들이 떠나고 현지인들도 거리에 활발히 다니지도 않는데 동생은 떠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이곳 사람들이 밖에서 밥을 먹을 곳이 없다며. 내가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해도 이럴 때일수록 자기가 할 일이 많다며 버텨야 살아남는다며 꿋꿋이 지내더니 드디어 원하던 장소에 좋은 가게를 찾았다며 기뻐했다.

나는 천 번이고 넘게 짐을 싸고 풀며 살아왔다. 언제라도 곧 다시 만나곤 하기에 무한대로 이해해주는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도 만남과 헤어짐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 마음을 누르고 다른 즐거움으로 애써 채워오며 더 멋진 세상을 향해 행복을 찾아다닌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두바이에서 서울로 돌아오는데 비행기로 9시간이면 되는 거리를 나는 집에 오기까지 왜 15년이나 걸렸을까.
동생에게 언제든지 집에 돌아올 수 있으니, 탁구공처럼 가볍게 왔다 갔다 하라고. 어디든 무엇이든 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외국에서 직장과 꿈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모든 동생들에게 멀리서 늘 응원하는 가족이 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이 세상에 흩어져있는 디아스포라(Diaspora)와 같은 여러분의 해외 생활을 축복하며
꿈 때문에 떨어져 지내는 안타까운 누이의 마음을 담아.

*디아스포라: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지칭한다.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거주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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