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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선 Nov 03. 2019

외국에서 사는 3가지 방법

그래서 나는 해외 취업을 했다.

     

한국이 나를 못 살게 군건 아니지만 외국에서 살고 싶었다. 나를 설레게 하고 미치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지금도 외국 타령이다.

로망은 깨지지 않았다. 후회로 남기 전에 로망을 현실로 이루려는 여러 번의 시도는 있었으나, 여전히 라디오에서 'Somewhere over the rainbow' , 'Hotel Califormnia', '기억 속의 먼 그대에게' 같은 내가 아는 익숙한 노래가 나오면  순간 나를 추억 속에 빠져들게 하고 과거로 소환한다.


 

내가 태어난 70년대는 아메리칸드림이 있어서 미국 하면 최고였다. 80년대에 와서 미국 교포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미국 유학은 나만의 때가 되면 먹으려고 야침 차게 아껴둔 굵고 긴 왕꿈틀이 같은 것이었다. 꿀꺽 삼켜버리기에는 감당이 안되고 걸리는 게 많았다. 꿈 많던 20대부터 40살이 넘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제는 늙어버린 용이 아직도 용트림을 하며 뱃속에서 꿈틀거렸다.

자주 그러는 건 아니지만 버킷 리스트를 쓰려고 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적으려 하면 '유학 가서 외국에서 살기'를 가장 먼저 적는다. 나에게 로망으로 남게 된 건 몇 가지 일들이 있어서다.

20대 초에 나는 승무원 준비생이었다. 당시 친구들이 취업 대신 미국 정착을 위해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미국 유학이 유행처럼 부의 상징이 된 시기였다. 그 영향으로 나도 유학 준비생들의 필수 코스인 박정 토플 어학원에 다니기만 하면 미국에 정말 갈 수 있는 줄 알았다.


우리 집은 중산층이라 듣고 자랐다. 그 기준이 묘하여 보통이란 게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는 상태인 줄 알았다. 피부가 하얗고 복이 많은 둥근 코에서 귀티가 나고 부잣집 맏며느리 같다고 해서 환상 속에 살았고,  내가 어떤 옷만 걸쳐도 그냥 있어 보인다고 했다.  엄마는 그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하신다. 없어도 티가 안 나니 누구에게 꾸이지 않아도 되고 아쉬운 소리 안 들어도 되고 그게 축복이라고 하신다. 부모님이 하고 싶은 거 다 해주셔서 그동안 중산층의 뜻을 알필요도 없이 모르고 컸다는 건 나만 몰랐을 테지만. 중간의 뉘앙스가 반밖에 없을 수도 있고, 반이나 있는 것은 마음먹기 달린 거라. 결국 원하는 걸 할 수 없었을 때, 보통이란 건 '없는 거'임을 자연스럽게 몸소 알았다.


7080은 학벌이 중요한 시대였다. 학교에서 성적이 좋아야 똑똑함을 인정받고, 부와 명예를 쥐고 흔들 수 있는 특권계층, 지도자층이 되었다. 예전엔 개천에서 용 나는 게 통했다. 지금은 학벌보다는 콘텐츠라고 해서 일반인들도 연예인급이 되고 젊은 SNS 부자들도 많다. 학벌과는 전혀 상관없는 게 유행인 시대인 것이다.

나는 70년대 생이여서 이름만 들어도 아는 미국의 대학교를 나온 사람이 제일 부러웠다. A클래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다. 그러다 보니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와야 B 클래스쯤은 될 것 같았다. 나 조차도 사람을 자꾸 학교로 등급을 매기는 사회 분위기에 스며들게 되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다 된다는 신조만이 나에게 희망이었다.

그러나 내가 집을 떠나  돌아본 세상은 달랐다. 인생을 풍요롭고 다양하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엄마는 내가 영화와 책을 너무 많이 봐서 그렇다고 한다. 그게 맞을 수도 있다. B와 C급 사이면 쫓기지 않고 편안하다.

현실에 비해 이상이 커진 건 꿈을 위해 성공을 갈망한 결과이다. 내가 정말 너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요즘은 자존감이 높다고 표현을 하더라. 노력파인 사람들의 자신감 충만으로 오만해진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한국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은 질문 때문에 또 나가고 싶어 졌다. 언제 한국에 돌아가려고 하느냐 결혼은 누구랑 할 거고.

한국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외국에 내가 모르는 경이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아직은 선택을 하기 싫다. 살 나라도, 살고 싶은 사람도. 인생의 방향에 제한이 없고, 정해진 규칙도 없으며 나에게 사회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곳이 필요하다.

삶의 변화를 이루려면 장소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환경을 바꾸는 것이 운명이 바뀌는 가장 빠를 방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3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1. 내가 외국인으로 태어났었어야지. (그건 다음 생에)

2. 내가 살고 싶은 나라에서 외국인이랑 결혼하기 (외국인이 나에겐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영어와 외국어로 소통하는 게 귀찮고 충분히 마음이 표현되지 않아 부담되더라)

3. 해외 취업이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만만한 방법으로 경험상 간절히 원하면 되더라. )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 외국 항공사 승무원이 되기로 했다. 항상 명랑해 보였지만 로망과 결핍이 있었던 거 같다. 땅에 발을 붙이지 않고 살았더니 부력이 생겼다. 그 힘이 오히려 성공에 대한 긍정적인 에너지가 되어 앞으로 달려 나가는 전투력을 가져다주었다. 아이러니다.


승무원 지망생이었던 시기 중에도 국내 항공사에 취업하여 공항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다.  공항에서의 근무는 내 목표를 더욱 분명히 깨닫게 한 시간이었다. 국경을 넘기 전인 공항은 내 꿈의 회색 지대였다. 항공 서비스 관련 직에 경험 쌓기 중이었고 , 밀물과 썰물의 애매한 중간 점이었다. 손에 닿을락 말락 한 꿈같은 외국 생활을 위해 모든 기회를 나에게 준 때였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이모가 살고 계셨다. 정말 오고 싶으면 각오를 하고 오라셨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 미국에서 일하며 불법체류자로 사는 방법도 있으니 다시 한국에 못 돌아갈 각오와 자신 있으면 미국에 정착하라고. 정신이 번쩍 든 일침이다. 잠시 나를 이끌어줄 구원 열차 티켓 같은 한 가닥의 희망인지 솔깃했지만, 외국에 취업을 해서 그 기반으로 세상 무대에 당당하게 나가고 싶었다.  아무래도 승무원이 되어야만 안전하고 자랑스럽게 살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승무원 채용 조건에는 ‘해외여행에 결격 사유가 없는 자’라고 나와 있다.

이 뜻은 전 세계를 자기 집 드나들듯이 여러 나라의 공항을 통과하기에 불법 체류자는 취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직한 방법을 선택하는 좁은 길이었다. 그게 옳은 길임을 알았다.

오랜 시기 동안 여러 항공사를 전전긍긍하며 면접을 보러 다니던 승무원 지망생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이 항상 열심히 하네, 노력파라고 평가했기에 나도 내가 그런 줄 알고 더 열심히 해버렸다. 그래, 나는 노력파다. 비록 유학파는 못됐지만.

부티가 나서 뭔가 있어 보이는 면접 때 유용했다. 재밌는 삶의 에피소드를 듣고 난  면접관들 모두가 나에게 호감을 가졌다. 외국 항공사 영어 면접을 볼 때마다, 척하면 알아듣고 떡하니 붙었다. 우선은 내 힘으로 열심히 해야 기도도 들어주실게 아닌가. 터미네이터처럼 입력된 목표가 제거될 때까지 전략적인 준비로 원하는 것을 얻어냈으며 합격의 운까지 따랐다. 보통의 가정 형편이라 경험했던 다양한 이야기는 외국인 면접관들과 대화를 나눌 때,  나의 삶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한 편의 <월간 로이스>의 편집장이 되어 실타래 뽑아내듯 술술 풀어낼 수 있었다.

그 결과 80개국 150개 도시를 자유롭게 다니는 승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원 없이 10년짜리 미국 관광 비자를 3번이나 받았었다. 이후에도 항공사를 3번이나 합격하여 3번이나 항공사를 옮겨 다녔다.

이렇게 자유롭게 미국을 갈 수 있는데 그때의 나는 왜 미국에 가기가 어렵고 세계를 무대로 살 수 없을 거란 나약한 생각을 했었을까?


 


승무원이 되어 외국에 살 수 있게 되어도 또 다른 게 부러워졌다. 내 안의 사울이 계속 등장한다. 전공과 관련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죽지 않고 기절했던 터미네이터가 컴백했다. 욕망의 추격전은 끝도 없다.

 한국을 떠나 인생 레벨업을 꿈꾼 지가 벌써 1O 년이 넘어가는데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40년 간이라 뱅뱅 돌았다는데. 금방 도착할 눈앞의 가나안 땅을 결국 들어가지도 못하고 같은 자리로 오고 떠나기를 반복하다 말았다.


비행기를 타고 9시간이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리를  10년이 걸려서 돌아왔을까? 전 세계를 몇 바퀴 돌고 돌아보니 세상의 끝과 내가 빙산처럼 연결되어 맞닿아 있었다.

호주, 중국, 두바이, 홍콩을 거쳐온 나의 외국생활, 사랑할 때 상대방을 통해 내 모습을 발견함과 같은 자아이동이었다.  내가 누구이며, 무엇과 사랑에 빠졌는지를 골똘히 생각하게 한다.

결국엔 지금 나도 지각 변동에 의해 한국으로 돌아와 뚝섬 전철역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

외국에 사는 방법을 찾으려고 돌아다녔던 시간들이 전철과 함께 십여분마다 스쳐간다. 세상 어디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다음을 기다리는데 힘이 빠질뻔 했다. 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재빨리 들어오는 열차를 보니 삶은 순환 노선이란 생각에 웃음이 난다.



로이스라는 이름으로 브런치에 글 쓰고

<외국 항공사는 왜 나를 뽑았을까> 책을 출간했습니다.

도자기와 글을 빚는 사라믹스 스튜디오 대표이며,

진로와 취업 면접 강의를 하는 라이프 클래스 아티스트

instagram@saramics_cera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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