쾰른에서 (조필롯의 이야기)

네덜란드드래곤은 독일에 있습니다

by 강윤선


나도 독일을 무척 좋아합니다. 좋아했었다는 말이 더 옳을 것 같군요. 남편을 독일에 두고 서울로 먼저 온 지 벌써 육 개월이 넘었으니까요. 그곳의 라인강 물줄기가 흐르는 아름다운 공원이며 야외 수영장과 독일식 사우나를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 티켓을 버리고도 계절이 바뀐 탓이 있으니까요.


나는 조필롯이었습니다. Co-pilot(부조종사)의 터키식 발음으로 터키 사람이 나를 최고의 조필롯 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운전할 때 졸지 않게 간식과 신나는 음악을 담당했거든요. 당시의 캠핑카는 짐차로 제작되어 보조석은 뒤로 젖힐 수로 앞으로 밀 수도 없이 빼도 박도 못하는 고문 의자였습니다.

허리가 90도로 굳은 자세로 몸을 비틀며 다녔습니다. 나를 안전벨트로 꽁꽁 묶어 세상 구석구석 끌고 다녔습니다. 바깥 풍경이 아무리 판타스틱한 장면이 나타나도 우린 대체로 고속도로를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120km로 달리면서 우리의 생활도 조급하게 흘러갈 뿐이었습니다. 잠깐 빠르게 스쳐 지나는 것을 붙잡고 싶지도 않았고, 이대로 직진하면 그곳에 무엇인가 잡힐 만한 것이 있을 거 같았지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수용소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은 들키지않고 오래 숨어있는 숨바꼭질 놀이처럼 상황 설정을 하여 아이에게 두려움 대신 놀이로 만들었던 장면이 기억이 납니다.

외국에서 일을 찾고 정착하기 위한 영업을 돌아다니는 일이었지만, 우리 둘에게는 한 편이 되어 함께 할 수 있는 캠핑카 여행이었습니다. 마음이 꺾이지 않도록 잘 먹고 기안죽는 코디를 하는 것이 조필롯의 일이었으니까요.


2024년에 우리는 함께 독일 여러 도시를 다녔습니다. 남편은 직업을 찾아 이동하는 철새처럼 한 도시에 이틀이상을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거처를 정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매일이 실전 정면승부 였습니다.

한 번은 쾰른 캠핑장에서 희미하게 뜨는 와이파이를 겨우 잡고 나란히 누워서 유튜브를 봤습니다.

왜 알고리즘에 유태오 관련 영상이 떴을까요?

1976년도에는 쾰른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두 남자가 태어났습니다. 내가 먼저 좋아했던 배우 유태오와 나를 먼저 좋아한 네룡이 있었습니다. 내 스타일의 남자가 쾰른에 둘이나 있었네요.


오빠 유태오라고 알아? 오빠랑 동갑이네, 유태오도 독일 쾰른에서 자랐다는데,
쾰른 한인 사회에서 서로 알고 지냈어?

남편에게 물어보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 생각난다. 초등학교 때 쾰른 살 때, 호텔과 식당을 함께 운영하는
한국 교민이 있긴 했었어.
세련되고 잘 생겼고 밝은 인상이 어렴풋이 기억이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유태오라는 사람이었을까?
아빠랑 그 고깃집을 자주 갔었는데, 거기 돼지고기 도나르가 얼마나 맛있었던지,
쾰른에서 그리스 돼지고기 Doner라는 귀로스 Gyros 캐주얼 식당이었어.
요즘 독일 음식을 터키식 도나르가 점령하기 전이야.
거기 도나르는 돼지고기가 훨씬 맛있었어.
그 아저씨가 진짜 똑똑했어. 앞서간 거지.

이후 유태오네 가족은 쾰른에서 식당과 호텔을 함께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축구 1세대 차범근 이후 다음 세대 주자인 프로 축구 선수들이 유럽 축구 전지훈련, 재활 치료를 위해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토종 한국사람 이민 1세대 출신 중에 1980년대에 식당과 호텔을 같이 최초로 운영한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었다군요. 독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기 음식인 도나르 가게를 한국 사람이 시작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1980년대에는 광산이 문을 닫고 광부들은 계약 기간 이후에 대부분이 독일에 남아 살게 되었습니다. 유럽 한인 사회는 그렇게 시작됐다네요. 1960년대부터는 합법적인 이민이 시작되어 이 기회에 독일과 다른 국가에도 이민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에 근로한 한국인 광부나 간호사들은 향수병이 가장 컸고 무시와 차별 외엔 핍박은 없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어디서나 하대 취급을 받기 마련이지만, 한국인들은 달랐습니다. 모범적이어서 범죄에 연루되는 일이 없고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대부분이 고졸 이상의 학력과 대학까지 나온 인텔리들도 많았습니다. 고학력자들이 많은 것은 정부에서 정한 자격 요건부터 중졸 이상으로 제한했고 경쟁이 치열해서였습니다.

독일 근로자 지원자 선발 심사과정에서 떨어질까 봐 일부러 손에 연탄 가루를 묻히며 국제 시장 영화에서처럼 애국가를 부르면서 떼를 써서 독일에 가고 싶어 했을 정도라고요. 빽으로 광부로 선발된 사람들은 좋은 학력을 가지고 있어서 일은 서툴렀지만 이미 가진 지식을 이용해 실제 광부 출신보다 독일 생활에 잘 적응했고 광부일이 끝난 후에도 타 직업으로 전직하여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그리운 것들을 남겨두고 온 사람처럼 유태오로 시작된 쾰른 이야기를 국수자락 뽑아내듯이 쭉쭉 뽑아냈습니다. 어둠이 부슬부슬 빗방울이 캠핑카를 툭툭 치는 이 밤에 길어지는 독백에 밤이 기 빨려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잠을 즘 자야겠습니다. 오늘 밤 꿈엔 쾰른 캠핑장에서 유태오를 만날 거 같습니다.


지금 독일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기에 지금 거기는 너무나도 한밤 중인 새벽 3시네요.

세상에 내 옆에 존재하는 남자는 이 한 사람뿐입니다. 우리 둘 사이즈만큼 딱 맞는 캠핑카 의자를 변신한 침대에 누워있는 네덜란드 드래곤요.

쾰른은 그에게 어쩌면 축구 선수가 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고, 나는 유태오네 가족이 쾰른에서 호텔과 식당은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는 누워서 함께 빗소리를 들으며 각자 다른 상상을 했습니다.


독일의 겨울밤에 내리는 비를 맞으며 캠핑카에서 잠을 청해봅니다. 글렀습니다. 누우면 더욱 선명해지는 빗소리가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는 것 같아 모른 척 잠들기엔 어수선한 밤으로 기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