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인생 첫 김장
'한국인의 밥상'은 내가 오래전부터 좋아해 온 TV 프로그램이다.
최불암 선생님의 구수한 내레이션과 함께 한국 곳곳의 풍광이 어우러진 그 지역 고유의 음식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마음이 위로를 받는다.
그중 인상 깊게 본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이민 밥상 특집이었다. 60-70년대에 남미, 유럽 등에 정착한 이민 세대들이 어떻게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는지에 대한 에피소드였다. 지금이야 세계 어느 나라의 대도시를 가도 한국 마트가 있지만 그 옛날 외국에서는 한국 식재료 구하기가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브라질, 멕시코 등 남미에 살았던 교포들은 Chinese Cabagge라고 불리는 배추를 구하기가 힘들어 양배추로 김치를 담가 먹었고, 독일에 사는 교포들은 족발이 너무 먹고 싶어 현지 정육점 사장님과 친해진 뒤 돼지 발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행지에 가면 그 나라 음식 먹는 것을 즐기는 나는 그 당시 그 에피소드를 볼 땐 '뭐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한국 음식 먹어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이 아니라 외국 생활 5개월 차에 접어든 지금은 그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도 온 지 2주 정도 지났을 무렵, 우리 집 밥상이 뭔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우리 집은 늘 제철 채소 샐러드, 메인 반찬 하나로 식사를 하곤 하는데 밥을 먹어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설마 김치 때문인가 싶어서 한국 마트에 가서 김치를 샀다. 오래 잊고 있었던 친구를 만난 반가운 마음으로 익숙한 맛을 기대하며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그 배신감이란! 내가 알던 김치 맛이 아니었다. 배추는 아삭하지 않았고, 맛은 너무 짜고 매웠다.
한국에서 나는 김치를 거의 먹지 않았다. 김치는 식당을 가도 항상 있고 집 냉장고에도 항상 있는 늘 있는 반찬 아닌가. 각종 맛 좋은 김치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온라인 쇼핑 한 번이면 갓 담근 김치가 바로 다음 날 배송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 김치, 저 김치 배달 시켜 먹어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맛의 김치를 찾았는데, 외국에서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이제 나는 배신감 느껴지는 맛의 김치라도 먹으며 더더욱 짙어질 향수를 달래야 하나 우울해하고 있었는데, 마침 한국 마트에서 무려 인도산 유기농 고랭지 배추를 예약 판매한다는 것이다. 앞 뒤 안 가리고 일단 냅다 여섯 포기를 주문했다. 그때까지 나는 태어나 단 한 번도 김장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훌륭한 유튜버 선생님들이 있지 않은가. 인도에 온 지 한 달 만에 나는 유튜브를 보며 인생 첫 김장을 했다. '내가 설마 김장을 하겠어?'라고 반신반의하며 챙겨 간 천일염과 고춧가루가 이렇게 빨리 제 역할을 찾을 줄이야.
그러나 배추 이외의 재료 공수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무는 없어서 생략했고, 쪽파도 없어서 대파도 쪽파도 아닌 어중간한 굵기의 파를 사용했고, 잣 대신 캐슈넛, 홍고추 대신 파프리카를 넣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김장의 훌륭한 조력자가 있었으니 말이다. 배추와 파를 씻고 다듬고, 다듬은 후 나온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 처리는 메이드 아줌마가 깔끔하게 맡아 주었다. 결과는 대성공. 내가 알던 맛의 김치였다. 심지어 너무 맛있어서 이것이 정녕 내가 담근 김치인 건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만들어 파는 김치 같다고 가족들도 극찬했다.
김치에는 정말 신기한 힘이 있다.
40년 동안 한 번도 김치가 소중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쌀밥에 된장찌개, 김치 조합을 먹으니 밥이 잘 넘어가고 힘이 난다. 이 익숙한 맛과 함께라면 매일 아침 새롭고 낯설게 다가오는 타국의 공기마저 곧 익숙해질 것만 같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지언정 늘 내 인생과 항상 함께해 온 김치였기에, 외국 생활이 녹록하지 않은 지금 나에게 버틸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같다. 그래서 교포들도 양배추로 김치를 담가 먹었나 보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인도에 갓이 나온다는데 갓김치 담가 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된다.
어쩌다가 인도에 와서 배추 절이고 풀 쑤고 김장을 하고 있다니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에게 김치가 있어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