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 and the City Season 1 SPRING
요즘처럼 아침마다 여러 사람에게 인사를 받은 적이 없다. 나보다 한참 나이 많으신 것 같은 분들이 쉴 새 없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들을 그렇게 하신다. 오늘도 수고하시라, 좋은 하루 되시라고. 바쁜 인파에 휩쓸려 그냥 지나가기가 어떨 때는 민망하기도 하다. 목례 정도로 답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고.
정작 자신은 그 자리에 없지만 지지를 열렬히 호소하는 사진 속의 그들. 레이스가 얼마 남지 않은 요즘엔 공원으로, 대학가로 나와 자신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평소엔 청년들에게 관심도 없더니 이제야 눈길을 돌려 청년공약들을 위시하여 소위 청년들에게 먹힐 만한 이야기들을 펼쳐 보이는 모습은 마치 반짝 시장에 나와 물건 파는 상인들 같다. 과연 살만한, 흥정할만한 것인가. 청년들은 매대 앞에 섰지만 고민 중이다.
무엇 하나 흡족할만한 건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터무니없는 걸, 누군가는 겉은 그럴듯해 보이는데 막상 들어보니 너무 무게가 가벼운 걸 들고 나왔고 심지어 누군가는 아예 이 청년 고객들을 위해선 빈손으로 나온 경우도 있다. 학업, 일, 결혼 모두 절벽을 만난 젊은이들에게 동아줄을 건네줄 이 누구란 말인가.
지난달. 고용센터에 서류를 제출하러 가는 동안, 앞으로 뭐해 먹고살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계속 생각했다. 이제 와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자니 너무 무모하다 싶고 그렇다고 신박한 아이디어도, 아이템도, 빵빵한 자본도 없고. 이런 날 도와줄 수 있는 그 어느 곳을 찾을 수도 없는데. 어쩝니까, 주님. 저는 정녕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30대를 보내는 건가요.
물불 가리지 않는 열혈 구직 활동 중, 예기치 않게 작년에 얻은 한국어 교원자격증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사실 자격증서가 집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걸 써먹을 수 있을지 그다지 기대는 없었다. 아예 외국에 나가면 가능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만 해보고 그냥 넘겼더랬다. 그런데!! 미쿡(미국보다는 왠지 미쿡이 느낌이 산다)사람에게 일주일 동안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 뭐 경력 쌓는 셈 치고 한번 해보기나 하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한국어를 정식으로 가르치는 건 처음이라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정말 막막했다. 가장 최근에 실전 한국어를 배웠던 이즈미가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이전에 일할 때와는 다르게 실로 기도가 절로 나왔다.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수업을 준비해 갔다. 처음, 학교에서 일했을 때가 생각나면서 지금까지의 학교생활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 아, 초심을 잃고 지냈구나. 그렇게 두 근 반, 세 근 반의 긴장의 시간이 흘러 미쿡에서 온 나의 첫 학생을 만났다. 그분은 비정상회담의 타일러 급으로 한국어를 잘하셨는데 나의 첫 경험을 위해서는 더없이 훌륭한 학생이었다. 언어에 대한 남다른 감각과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분으로, 내가 주제만 던지면 굳이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술술 풀어내는 것이었다. 비정상회담에서 외국인들이 매주 방송하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와 사회구조, 언어의 차이점, 심지어 한국 대통령 후보와 정책에 대한 검증도 했다(오히려 실제로 투표를 해야 하는 내게 도움이 되었다). 정말 재미있고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가보지 않은, 꿈만 꿨던 일을 시작했다.
출강 장소가 시내라서 참으로 오랜만에 출근버스와 열차에 몸을 실었다. 버스와 열차가 토해내는 인파는 다시 봐도 놀랍기만 했다. 다들 이렇게 출퇴근을 했던 거구나. 장관이었다. 젊은이들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에 치여, 시간과 배차간격에 쫓겨 떠밀리듯 회사로 가고 있었다. 힘들고 지친 그들에게 위안이 되는 건 작은 화면에 떠 있는 SNS 뉴스피드, 어제 못 본 드라마, 팡팡 터지는 카카오프렌즈 캐릭터들이었다. 물론 이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학원과 도서관에서 여전히 문제집과 인강을 붙들고 씨름하는 청춘들도 많이 있다.
출입문 쪽에 몰린 인파의 무게를 온몸으로 버티며, 앞에 선 키 큰 남자가 팔꿈치를 들 때마다 얼굴을 맞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나는 매일 그 좁은 틈에서 휴대폰 성경 어플을 연다. 바쁨과 어지러움 속에서 더욱 그분의 말씀에 집중하며 기도하게 되었다. 노하우도 없고 능력도 없는 내가 이런 새로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은혜가 절실했다. 많은 계단을 오르내리고 바쁜 걸음을 옮기느라 다리는 후들거리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난 자신감과 안정감을 느낀다. 양 옆의 사람들과 부딪힐 때마다 그분의 강한 붙드심을 더욱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제의를 받은 건 일주일 수업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수업이 끝나고 두 번째 수업 계획이 잡혔다. 이번에는 무려 4주. 휴지기 없이 바로 일을 이어갈 수 있게 된 점도 감사할 일이었다. 학생은 주말에 비행기 타고 와서 바로 월요일부터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 역시 미쿡사람이었다. 그가 한국에 오기 전, 한국어 구사 수준을 알아보고 수업 준비를 하기 위해 스카이프로 영상통화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연락 상의 착오로 통화는 무산되었고 결국 학생에 대해 내가 직접 얻은 정보는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수업을 준비해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친구는 갖고 있던 한국어 교재들을 몽땅 빌려주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월요일에 그를 만났다. 이게 웬걸, 나는 이소라, 학생은 이솔아(교포였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소개를 마친 우리는 그저 허허 웃었다. 비슷한 이름 때문인지 서로 편하게 마음을 열고 시작하게 되었다. 그분의 손길이 아니라면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뿐 아니라 최근에 그동안 관심 있었지만 해보지 못했던 일들도 시작했다. 막연히 동경만 했던 번역을 배우기 위해 강의도 듣고, 독립출판물 제작과 유통, 홍보를 배우는 워크숍에도 등록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아닐까 싶다. 새로운 일을 구상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정말 즐거웠다. 이건 꼭 해야 해, 하고 말 거야!!라고 생각했던 게 아니었던 걸 보면 마찬가지로 이 또한 그분이 허락해주신 일이 맞다. 내가 살아온 그 어느 때보다 청춘과 거리가 멀지만 지금이야말로 내겐 가장 새롭다.
세상은 우리 청춘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겠다고, 지원해주겠다고 앞 다투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그걸 줄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건 아마 무모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도전하는 사람들을 모두 부러워하고 동경한다. 그게 바로 <무한도전>과 <꽃보다 시리즈>, 그리고 <윤식당>이 사랑받는 이유다. 그런 도전은 현실에 사는 우리에겐 정녕 불가능한가? 아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렇게 사는 사람도 어딘가엔 있다. 얼마 전,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이 말씀을 발견하고 난 이거다!! 했다(무릎을 치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고). 그렇다. 우리의 소원과 꿈을 아시고 기억하시는, 그래서 새로움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시는 분. 튼튼한 우리의 동아줄, 바로 그분이 함께 하시기에. 그분을 아는 우리에겐 항상 새로운 시작이 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 시 103:5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 시 105:3
_ SPRING / '17년 5월 / HATC Season 1 EP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