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 and the City Season 1 AUTUMN
열혈 글쓰기 초보자였던 스무 살 초반. 지루하고 머리 아픈 수학과 영어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24시간 내내 할 수 있다면 원이 없겠다던 내 말대로 마침내 난 매일 시집과 소설책, 고전 희곡, 영화 시나리오를 붙들고서 컴퓨터 모니터 앞의 붙박이 신세가 됐다. 내가 할 일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항상 ‘써야’했다. 쓴다는 행위 자체는 내게 신나고 즐거웠던 일이 분명했지만 동시에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사실 후자가 훨씬 많았다. 특히, 뭘 써야 할지, 이다음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을 때가 그랬다(+ 마감이 다가오는 중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지금도 매 달 말마다 그러는 것처럼). 하얀 바탕화면 위에서 커서는 계속 깜박거렸다. 지금 내가 쓰는 아이폰처럼 몇 분 지나면 까맣게 변해서 아무것도 재촉하지 않았다면 참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14인치 흰색 모니터는 18, 20인치로 커지더니 어느새 영화관 스크린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고 깜박임은 백만돌이처럼 절대 멈추는 법이 없었다.
또 다른 경우는 내가 구상한 대로 글이 써지지 않는 때다. 쓴다고 썼는데 앞뒤 사건의 개연성이 맞지 않고 이런저런 사건들을 뷔페 접시 위에 음식을 쌓듯 욕심내서 힘들게 쌓았는데 오히려 말도 안 되는 경우와 같은 것 말이다.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갈등을 멋있게 만들어보려고 이리 틀고 저리 틀어 새끼 꼬듯 꼬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지 손을 댈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내가 만든 미로에서 길을 잃는 그런 순간이 작가에겐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가장 간단한 해결 방법은 ctrl+a 와 delete키를 누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정말 쉽지 않다. 그동안의 모든 수고를 무위로 돌리고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다.
원작자는 분명한 의도와 주제를 가지고 작품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꼭 한 번씩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지점을 마주하게 된다. 모든 통제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선뜻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것을 경험한다. 마치 내가 만든 세상의 그들 혹은 그것들이 내 말대로가 아닌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작가의 손을 벗어나 마음대로 활개 치며 돌아다니는 가상 인물의 흔적들. 이러한 아이디어와 상상 때문에 우리가 잘 아는 고전 소설 주인공이 사라진 소설을 복원하는 과정을 다룬 이야기를 어떤 작가는 소설로 쓰기도 했다.
K형제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혹시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으실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들의 인생이라는 글을 쓰시는 작가이신 하나님은 분명 각각의 책에 따라 저마다의 목적과 의도를 분명히 가지고 집필 중이신 게 분명하다. 그런데 작품 속 주인공들은 도입 부분에서부터 길을 헤매기 시작하더니 밑도 끝도 없는 좌절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한다. 또는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갑자기 길도 없는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도 한다. 다다른 페이지는 고작 30여 쪽 밖에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작가의 입장에선 복장 터질 일이다. 할 말이, 넘어야 할 산이, 이루어야 할 미션이, 멋진 결말이 한참 남아있는데 이 무슨 답답한 노릇인가. 작가의 원대한 계획과 작품에 대한 비전은 아직 ‘ㄱ’자도 꺼내지 못했는데.
‘당신을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맞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한 고백. 세상을 향해 호기롭게 던진 나의 선포는 이미 오래전 일어난 일이 되었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전적인 나의 의지로 선택한 작품 속 인물의 삶이었는데 어느 순간 창조자는 간 데 없고 ‘나’라는 자아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비전의 지향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며 그것을 이루고 싶다면 하나님 안에서 평안함을 누려야 한다는 그동안 많이 들어온 이야기. 하지만 이번만큼은 비범한 도전으로 다가왔다. 내 인생을 진취적으로 개척해서 큰 일을 이루겠다고 뜨거운 마음으로 했던 고백을 여러 번 들어오셨던 그분은 과연 어떤 마음이셨을까. 기쁘기도 하셨겠지만 동시에 그게 아니라고 말리고 싶은 양가적인 감정이 아니었을지. 그저 나는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ctrl+a 그리고 delete 콤보를 그분이 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건 정말 말 그대로 최후의 보루다.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어지간히도 속을 썩이고 지름길을 두고도 그렇게 하라고도 못할 만큼 답답하게 헤매는 걸 그분은 수도 없이 참아오셨다.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시고 불같이 화도 냈다가 달래고 따끔하게 혼냈다가 얼러가며 끝까지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셨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셨다. 싹 다 갈아엎고 다시 시작하셔도 할 말 없는 나의 인생 이건만 그분은 내가 플롯을 이해할 때까지(사실 내 이해는 필요도, 상관도 없는데!!) 청사진을 열어 보여주시고, 롤 모델인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 들려주신 말씀도 그런 그분의 손길 중 하나였다. 막혔던 길을 돌아 나왔다가도 다시 그 길로 걸어가는 나를 붙잡으시곤 내비게이션을 켜서 보여주셨던 거였다.
하얀 바탕을 배경으로 하는 멋진 장면들이 몇 가지 있다. 캔버스에 그려지는 강렬한 원색의 첫 붓 터치. 고민을 거듭하던 펜이 마침내 움직여 하나둘씩 음표들로 채워지는 악보. 깜박이던 커서가 문자들의 향연으로 점점 오른쪽으로 자리를 바꾸는 순간. 프린터기가 따끈따끈하게 토해내는, 타투처럼 활자들을 새기고 나온 종이들. 공백이 채워져 하나의 작품이 되어가는 모습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등장인물은 그저 작가의 펜을 따라 춤출 뿐이다. 그분의 펜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기민하게 지켜보고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한다. 나를 향해 그분이 계획하고 계신 결말을 볼 수 있게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꺼이 그분의 펜촉을 따를 수 있기를 구한다.
Lord, You are the author of my life, You have begun a work in me,
You have predestined me To do Your perfect will.
And Lord, You are the Lord of all my days, You are the Lord of all my nights,
You have chosen me To carry forth Your word.
So Lord, finish in me what You've begun,
Guide me by Your mighty hand, Lord: Let me trust in You.
And Lord, let me seek Your holy face, May I always walk with You, Lord,
And let Your will be done.
<Lord, You Are The Author Of My Life> - Judy Pruett
_ AUTUMN / '16 9월 / HATC Season 1 EP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