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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리 Nov 1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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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ven and the City Season 3 EP 04

지난주에 얀센 백신 부스터 샷 접종을 받았다. 다른 걸로 맞는 게 괜히 무서워서 나는 이번에도 그대로 얀센을 신청했다. 접종 당일 돌아와서 집에 있는데 머리는 띵하고 정신은 멍해서 뭘 하긴 좀 그렇고, 그렇다고 아직 잠은 안 오고 가만히 앉아 있자니 그것도 좀 그래서 요즘 인기라는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틀어서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날에만 앉은자리에서 세 편을 연달아 봤다. 처음에 분명 조금만 보다가 졸리면 잠들어야지 했는데. 우리나라에는 참 재주가 좋은 사람들이 많다. 노래하는 오디션에는 노래 잘하는 선수들이 그야말로 쏟아져 나온다. 도대체 어디 있다 이제야 나타났나 싶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이제는 춤꾼들이 그 뒤를 이어받은 모양이었다. 이렇게나 멋있게 춤을 잘 추는 여성들이 많이 있었는지 이제야 실감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중 여러 생각을 하게 했던 건 출연 크루 중 하나인 프라우드먼의 세미 파이널 미션이었다. 모든 크루들은 세미 파이널 미션으로 두 가지 작품을 구성해야 했는데 하나는 가수 제시의 신곡 안무를 만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성 크루들을 섭외하여 혼성 무대를 꾸미는 것이었다. 힙합을 기반으로 곡을 만들고 그에 맞는 안무를 선보여왔던 제시에게 프라우드먼은 자객을 콘셉트로 하여 오리엔탈의 느낌을 가미한 안무를 내놓았다. 프라우드먼의 안무에서 주인공인 제시는 자객이 되어 복면을 쓰고 나와야 했다. 그 무대를 보고 모두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게 제시랑 어울리나? 자신의 이미지를 모두 지우고 자객으로 복면을 써야 하는 이 안무를 제시가 과연 선택할 것인가? 이 안무는 노래를 만든 가수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대신 음악 자체를 퍼포먼스가 완전히 장악해버린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두 번째 미션에서도 프라우드먼은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다른 크루들은 다양한 남성 댄서들을 섭외하여 무대를 준비했지만 프라우드먼이 섭외한 남성 댄스는 단 한 명이었다. 그들은 ‘Man of Woman’의 콘셉트에 맞추어 여성은 남성으로, 남성은 여성으로 분장을 하고 Jill Scott의 <Womanifesto>라는 곡에 맞추어 무대를 준비했다. 흡입력이 엄청났던 무대였지만 이 무대를 끝으로 프라우드먼은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무대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탈락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정확하게는 프라우드먼의 리더 모니카의 태도였다. 그는 어떠한 결과가 나와도 책임을 지고 그 무게를 견디는 게 어른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 순간을 제대로 살아보는 것이 프라우드먼 크루의 목표라고 말했다. 그들이 왜 그런 무대를 보여주기로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인터뷰 내용이었다. 또한 그는 대중들이 더 많은 댄서 신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 이 방송에 나온 자신의 목적이었다고도 말했다. 그랬다면 그 목적은 200% 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이 누구인지, 클래식 댄스와는 또 다르게 몸으로 자신들을 표현하는 멋진 댄서들이 얼마나 많은지 나 같은 사람도 드디어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만나기 전에 이 많은 댄서들은 이미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유명 아티스트들의 안무를 전담하여 다수의 협업을 진행해 온 베테랑 안무가들이 대부분이었고 대학에서 스트릿 댄스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물론, 최고의 실력으로 이제는 올림픽 무대의 데뷔를 앞두고 있는 국가대표도 있었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그들은 멋진 무대를 만들기 위해 자신을 지우고 무대의 옆과 뒤에서 묵묵히 수고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그들이 중앙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이었다. 자신들이 꿈꾸었던 무대를 만들어 선보일 수 있었던 것으로 이미 우린 할 일을 다했고 실력을 유감없이 보였기에 자신의 크루가 그 누구보다 가장 멋지다고 말하는 이들의 인터뷰 내용은 나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대중들의 요구와 선호를 가장 잘 알고 있을 모니카였지만 그는 그것을 따르기보다는 자기들이 만들고 싶은 무대를 만들어서 보여주는 편을 택했고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탈락이 결정되고서 모니카는 너무 죄송하고 저희를 응원해주신 분들에게 제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면서 눈물을 보였지만 나는 그가 정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런 파격적인 무대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탈락 자체가 실패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이 끝난 지금에도 유튜브에 올라온 프라우드먼의 영상에 표시되는 조회수와 댓글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본다. 


HATC 두 시즌을 거쳐오면서 나는 30대 후반의 조금은 어둑어둑했던 시간들에 대해 썼다. 나에게 그 시간들은 자욱한 안개로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길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2018 조선통신사>에서 쓴 것처럼 구름을 뚫고 올라온 비행기 안에서 밝은 하늘과 더불어 폭신한 솜구름들을 만났던 당시를 기억하며 앞으로의 나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마음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매년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마음은 쉬이 밝아지지 않았다. 특히 해가 일찍 지는 겨울에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때에도 나는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려고 열심을 다했다. 새로운 일들도 시작해 보았고 나름의 여러 도전을 감행해가며 그 시간들을 보냈다. 계속 글도 썼다. HATC 두 시즌을 가득 채울 만큼 나에게 계속해서 글감을 던져주었기에 그 시간들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어두운 마음이 걷히기엔 역부족인 경우가 훨씬 많았다. 도대체 그때 나는 왜 그런 마음들로 가득했을까.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보면서 왜 내가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과 작업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을 때 실망하고 좌절하며 눈물짓기도 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멋지게 보여주는 편을 택했다. 왜 우리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느냐며 항변하지 않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였으며 승자에게는 박수를 보냈다. 정말 자신을 맘껏 펼치고 드러내는 시간들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 


언제나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면서도 나 자신과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나는 자신이 별로 없었다. 나이 먹고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나이 먹었으니 그런 무모한 짓은 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더 이상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답 없는 삶에 한탄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고 마침내는 나를 지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까지 의심했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어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Matt 5:15)게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오히려 나는 스스로 그 등불을 말 아래 내려놓는 사람이었다. 당시 어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건 빛나는 등불을 어둔 곳까지 잘 비칠 수 있도록 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 컸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진로와 인생에 대한 고민은 10년 전이나,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전과 비교하자면 어떤 면은 더 퇴보한 것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이것들을 깨달은 나는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 모든 사실을 다시 생각하니 어제의 나에게 난 너무 미안했다. 열심히 살아왔던 너를 더욱 빛나게 대해 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 미안하다. 누군가 그때의 나에게 지금도 잘하고 있다고, 그 분투가 아름답게 빛나는 너를 만들고 있다고 말해주었다면 진작 그 등불을 등경에 올려둘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심으로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누구나 춤을 출 수 있다는 말이 정답인 것처럼 당신이 최선을 다해 지금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게 정답이라고. 정답을 찾아가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말이다. 


또한 지금의 이런 나의 삶을 쭈구리처럼 대하기보다는 빛나는 등불로 삼아 어두운 곳을 더욱 밝히고자 한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건 오늘 할 수 있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두 개의 알바의 납품 기한을 맞추려고 시간을 쪼개 일을 하고 잊을만하면 다시 울리는 브런치의 푸시 독촉에 최대한 열심히 맷돌을 굴려보면서 워드를 끄적이며 없는 실력이지만 요리를 해서 또 한 상의 식탁을 차린다. 이 시간에도 그분은 여전히 일하고 계시고 이런 나의 모습을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오늘이 모여 빛나는 내일의 나를 만들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I am gifted
I am all of this – <Womanifesto> by Jill Scott



Who is this that grows like the dawn, 

As beautiful as the full moon, As pure as the sun, 

As awesome as an army with banners? – Song of Solomon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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