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과 정치학
지혜란 실망의 연속에 날카로움보다는 무뎌지기도 하고, 고결한 가치는 행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상주의에 빠진 순진한 시절에 그치고 만다.
영문학을 전공했던 학부시절 나는 현재 매일 다루는 사회과학 현상 이전에 본질에 대해 학습을 넘어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의 시기가 있었다.
문학전공을 통해 본질만을 평생 다루기에는 나는 야심이 있었고 나의 가능성을 모두 펼쳐보고 싶어 사회과학을-국제정치로 시작한 관심을 따라가다보니 정치학을 대학원에서 전공하게 되었다- 20대 중반부터 공부하게 되었고 직업에 연계했고, 늘 크고 작은 조직생활을 해왔기에(그럼에도 아직까지 틀에박힌 사회인의 페르소나는 거부감이 든다) 온갖 처세술이 난무하는 살벌한 역학관계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문학의 지혜보다는 현실주의 국제정치적 시각으로 가장 조심스럽고 명확한 방법만으로 분석을 하기에 이른다.
현실주의적 분석은 실수를 하지 않는 안전한 방법일지는 몰라도 영혼의 기운을 앗아가고 한 때 내가 영미시 한줄한줄을 분석하기도 전에 감각으로 이해했던 시절이 있다는 것이 까마득하다. 현대 미국시는 몇페이지에 걸친 장문에 대부분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어서 도저히 시같은 느낌이 나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분위기를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을 때는 나에게 읽게 하고 '이제 어떤 느낌인지 알겠지요?'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내 인생에 영원히 남을 칭찬이다.
진지하게 마주하지 않은 소중한 순간들에 대한 후회가 잠시 지나간다. 영문학을 하면서 문학이 가진 느낌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었지만, 야심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문학을 즐겨본 적은 20대 이후로 없는 것 같다.
그야말로 지식과 이념과 단기목표만으로 꽉찬 일상을 채워나가도 허전함만 가득한 이유는 지식을 넘어선 지혜와 이념을 분석할 철학적 고민, 단기목표가 궁극적으로 지향할 방향을 잃어버린 탓이었다.
아직도 문학적 가치가 내 삶을 느리게한 것인지 내 삶을 그나마 목표에 가깝게 도운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가끔 불현듯 떠오르는 문장들이 아직도 건조하고 격앙된 세태의 힘을 빼는 것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 잊은 것은 아닌 것 같다.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