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열의 밤
그날은 새벽 수유부터 몸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날따라 아이도 새벽 수유 후 다시 잠들지 않았다.
근육통 위로 춥고 더움이 번갈아 오고, 머리는 낮게 울렸다.
평소라면 마약성 진통제로 버티곤 했지만, 아픔이 달랐다.
남편의 재택근무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
남편의 팔을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나 한 시간만 잘게요. 일 시작 전에 깨워줘요. 아이 좀 봐줘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전기장판 온도를 올리고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오들오들 떨다가 금세 잠들었다.
그러다 거실을 가득 채운 아기 울음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이와 누운 채 책도 읽고 놀다 보니 아이의 수유 시간이 다가왔다.
태열이 많은 아이라 21도로 맞춰진 에어컨 온도가 유난히 아픈 몸을 자극했다.
극세사 잠옷을 껴입고 이불을 몸에 두르고 그 위로 아이를 안았다. 이불 끝을 여민 채 수유를 했다.
젖병을 소독하고, 분유를 재어 두던 손놀림이 그날따라 느렸다.
그렇게 버티며 아이에게 수유를 하다 보니 남편의 점심시간이었다.
남편은 내 상태를 보더니 결국 안 되겠다 싶었는지 시어머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어머님이 오셔서 아이를 맡긴 후 방에 들어가서 열을 재보았다. 38도.
나는 항암환자라 38도 이상이 한 시간이 유지되면 병원을 가야 한다.
오후로 넘어갈수록 몸의 속도가 더 느려졌다.
암막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이 아직 낮임을 알려줬고 전기장판의 열이 미지근하게 번졌다.
자다 깨면서 계속해서 체온을 재봤지만, 체온은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남편의 근무가 끝날 때까지 열은 내려가지 않았다.
저녁 9시, 결국 치료받고 있는 병원의 응급실로 향했다.
가자마자 시작되는 여러 검사들과 채혈로 지쳐갈 때쯤,
의사 선생님이 와서 이야기했다.
“지금 호중구 수치가 너무 안 좋아요. 정확한 검사는 나와봐야 알겠지만 격리를 시작할 거예요. 그리고 역격리 병실에 입원해야 해요.”
그렇게 언제 퇴원할지 모르는 나의 입원이 시작되었다.
병원을 찾으면 입원해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최대한 버텼던 건데...
시계가 다음 날로 넘어가고, 바닥 치던 혈압이 조금 회복되고 나서야 병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백혈구도 적혈구도 바닥이라 수혈이 필요했다.
열은 다음 날 밤에도 내려갈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40도까지 올랐다.
얼굴에는 열꽃이 피듯 붉은 반점이 빠르게 번졌다.
해열제를 바꿔가며 계속해서 체온을 쟀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해열제에서 37.5도.
간호사 선생님이 체온계를 확인하곤 얼굴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담당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허락을 받고 나서야 수혈을 받을 수 있었다.
링거 줄을 타고 들어오는 노란 혈액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졌다.
한 고비 넘기고 나니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열이 오르고 면역이 낮아지자, 재수술로 삽입한 케모포트에서 진물이 다시 배어 나왔다. 또 염증이다. 케모포트 문제는 벌써 두 번째였다.
남들은 한 번 삽입하고 항암이 끝나도록 아무 문제없다는데, 나는 왜 두 번을 넣고도 또 말썽일까?
결국 AC 항암을 위해 버텼던 내 케모포트였지만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어쩔 수 없이 팔로 남은 항암을 진행해야겠어요. 지금은 감염 위험이 있어서 제거 후 수술 부위를 열고 나올 거예요. 그리고 상처가 괜찮아지면 그때 닫는 수술을 할게요.”
그 말에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마다 항암 부작용이 다 다르다지만, 나는 왜 이렇게 수많은 부작용을 다 겪게 되는 걸까? 얼마나 더 힘들어야 이 항암이 끝이 날까?’
그렇게 다음 날까지도 이어졌던 열이 내리고,
한 번의 수혈을 더 했고, 두 번의 백혈구 촉진 주사를 맞은 뒤
주말이 지나고 나서야 격리가 해제되었다.
약해진 팔에는 수없이 붙였다 뗐다 한 테이프와 함께 살점도 같이 뜯어져 붉은 상처들이 수두룩했고,
팔과 손등, 발등까지 멍들이 또 자리 잡았다.
열이 오르고 내리고, 채혈과 주사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묵묵히 견뎠다. 눈물은 없었다.
그러다 영상통화 속 딸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 났다.
화면 너머의 작은 손짓, 웃다 말고 멈칫하는 표정.
통화를 끊고 사진을 넘기다 보니 또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그렇게 마음이 약해지자 수많은 순간들에도 금방 눈물이 차올랐다.
다 터져버린 혈관들이 야속했고, 바늘이 아파서 슬프고,
발등으로 채혈하는 내 처지가 서글프고,
팔뚝에 수많은 바늘 자국과 멍들까지 슬펐다.
슬퍼할 이유는 넘치고 넘쳤다. 찾으려면 얼마든지 계속 울 수 있었다. 그렇게 난 병실에서 울보가 되어버렸다.
수요일에 입원해 일주일을 지나 목요일이 되어서야 드디어 퇴원할 수 있었다.
9일의 입원 생활에 체중은 3킬로가 빠져 있었다.
퇴원하자마자 바로 짐을 내려놓고 시댁에 딸을 보러 달려갔다.
9일 만에 본 엄마. 딸의 눈에는 잠깐의 어색함이 비쳤다.
“우리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지낸 건 처음이지.”
엄마를 보고 바로 웃어 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딸이 내비친 어색함에 섭섭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그래, 딸도 엄마가 사라져서 섭섭했을 거라 생각하며 피차 섭섭한 걸로 퉁치자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남편은 입원 기간 동안 체력이 소진된 날 보며 아이를 안을 수 없을 거라 말했지만,
막상 아이를 본 나는 어디서 힘이 났는지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미지근한 우유 냄새, 딸의 따뜻한 체온, 품에 닿는 숨소리,
손가락으로 내 엄지를 꼭 잡는 힘.
그 몇 가지면 충분했다.
우리, 앞으로는 이런 갑작스러운 이별은 만들지 말자.
그리고 앞으로 남은 항암은 제발 몸이 버텨주길 바라며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