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의 기적이라는 말이 있다.
항암을 한 사람이라면 꼭 들어본 말일 것이다.
기적이라니 좋은 말 같지만 여기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항암을 시작하면 정말 신기하게도 딱 14일 후부터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다.
항암 시작 전, 교수님께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머리가 빠지지 않는 경우도 있나요?”
되돌아온 답변은 단호했다.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특히 여성암 환자는 누구도 빠짐없이 겪는 부작용입니다.”
여성암 환자에게 꼭 피하고 싶은 부작용이 뭔지 묻는다면,
대부분은 한마음으로 말할 거다.
바로 ‘탈. 모.’ 머리카락 빠짐이다. 나도 그랬다.
암 진단 후 항암 부작용에 대해 미리 수없이 찾아보고 공부했지만,
과연 다른 방법은 없을까 싶어 헤매던 마음속 탈모는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나는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암 진단 전부터 출산 후 탈모에 대한 걱정이 늘 있었다.
짧은 단발에서 결혼 준비를 하며 길렀고 결혼 후에도 상한 머리를 자르고 영양 관리도 받으며 정성껏 길러온 내 머리카락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100일 무렵이면 엄마 머리카락도 아이 머리카락도 함께 빠진다고 들었을 땐,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무거웠었다.
출산 전 미용실에서 상한 머리를 자르며
디자이너 선생님과 출산 탈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출산 후 두피에 영양을 충분히 넣어주면 후드득 빠지는 일은 덜할 거라고 들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관리하려고 계획도 세웠다.
그런데 항암 탈모라니.
출산 후 탈모를 걱정하던 내 모습이 오히려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 많은 사례를 찾아봤다.
쉐이빙을 하지 않고 버티는 사람,
미리 머리를 깎아버리는 사람,
버티다 결국은 쉐이빙 하는 사람.
각양각색의 사례는 많지만 탈모를 완전히 피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출산을 기다리며 누워있는 그 하루사이에 결심했다.
‘아기도 머리숱이 적고, 나도 머리카락이 없으니
엄마랑 같이 대머리 하면 되지.’ 그렇게 애써 긍정적이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출산 당일, 아기를 보기 위해 하반신마취로 제왕절개 수술을 했고 응애- 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나타난 아기는 눈에 선명히 까만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었다.
초음파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던 머리카락이라 아이가 이렇게 머리숱이 많게 태어날지는 상상도 못 했다.
정신없던 순간에도 ‘엄마랑 같이 대머리는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치는 내가 어이가 없기도 했다.
조리원에서 머무는 동안에도 나는 몸조리는커녕 상처가 덜 아문 배를 붙잡고 병원 검사를 위해 병원을 오가야 했다.
병원 검사를 마친 뒤 조리원에 복귀하기 전,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짧게 잘랐다.
분명 몇 주 전에는 관리하겠다며 상한 머리를 자르고 간 내게 디자이너 선생님은 “마음이 바뀌었나요?”라고 물었고,
나는 답했다.
“아기가 머리를 많이 잡아당긴대요. 그냥 짧게 자르고 다시 기를까 해요.” 하며 살짝 웃었다. 속으로는 울컥했지만 눈물은 참았다.
시간이 흘러 항암 치료 13일째. 내일이면 14일째인데도 아직 내 머리카락은 빠질 생각을 안 했다.
잠시나마 ‘난 조금 더딜 수도 있지’ 하며 위안 삼은 것도 잠깐 14일 차 되는 날,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다 샴푸를 끝내지 못했다.
머리를 헹구며 물이 흘러내릴수록 머리카락이 점점 더 우수수 빠졌다. 대충 수습한 뒤 드라이기로 말릴 때도,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스칠 때마다 바닥에 머리카락이 떨어졌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슬퍼서 눈물이 많이 났다.
돌아보면, 암 진단을 받고 흘린 눈물 다음으로 항암 치료 중
가장 많이 울었던 날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미용실의 트인 공간에서 머리를 밀 용기가 없었고, 멀리 있는 항암 쉐이빙 전용 미용실을 갈 시간도 없었던 터라 쿠팡에서 급히 이발기를 주문했다.
이발기는 다음 날 새벽에 도착했지만, 아직 용기가 나지 않아 며칠을 미뤘다.
모자도 여러 개 사서 준비하고 주말이 지나고 그제야 조금씩 용기가 났다.
머리를 밀기 전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손으로 엉성하게 머리를 쓸어내렸다. 30분 넘게 머리를 빗었지만 빠지는 머리카락은 멈출 줄 몰랐다. 다리 사이에 수북이 쌓인 머리카락을 보며 ‘아 오늘은 진짜 머리카락을 밀어야겠다.’ 생각했다.
남편이 머리카락을 밀어주겠다 했지만,
신생아를 돌보면서 내 머리를 밀어주기란 어려웠고
결국 나는 혼자 늘 보던 욕실 거울 앞에 섰다.
‘내일의 안녕’이라는 영화 속 페넬로페 크루즈처럼,
조용히 머리를 밀었다. 잠시나마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머리카락이 빠져나갈 때는 아팠지만, 머리를 미는 순간에는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남은 머리카락은 아이를 재우고 온 남편이 면도기로 마저 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대머리 엄마가 되었다.
머리를 밀지 말지 고민하는 암 환자들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머리카락이 빠질 때마다 남은 머리숱이나 빠진 양만 헤아리다가는 더 아프고 슬퍼질 뿐이다.
오히려 머리를 밀고 나면 마음이 훨씬 담담해질 것이다.
물론, 거울을 마주할 때나 예전 긴 머리 사진을 볼 때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먹먹한 건 사실이다.
머리를 밀었다고 다른 부작용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두피 전체에 모낭염이 생기기도 한다.
짧은 머리카락이 베개에 박혀서 의외로 신경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루하루 견디다 보면,
스스로 조금씩 단단해지는 나를 만나게 된다.
슬픔은 남아 있지만
결국엔 다시 머리카락이 자라날 거라는 희망도 생긴다.
그리고 적어도, 이렇게 버티다 보면 언젠가 다가 올 내일은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