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보고 싶은 순간들이 많다.
나는 엄마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전 몇 년은 엄마의 투병 생활로 오빠와 나는 할머니 집에서 초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완치 판정을 받고 다시 함께 산 지 얼마 안 되어 엄마의 암이 재발했다.
중환자실의 엄마를 보러 가던 날들 중
엄마가 나를 점점 알아보지 못하던 순간이 많아졌다.
그로부터 얼마 뒤 아빠가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엄마를 보낼 준비를 해야 한대.”
그 말은 바깥공기를 낮게 깔았고,
나는 그 공기 속에서도 숙제를 하고, 급식을 먹고, 친구들과 웃었다.
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때의 나로는 그렇게 하루를 사는 방법밖에 몰랐다.
그날도 그랬다.
4월의 봄은 따뜻했고, 새 학기는 들떠 있었다.
새로 사귄 친구들을 잔뜩 데리고, 장난을 치며 집으로 들어서던 하굣길.
현관문을 여니, 보지 못하던 신발들이 빼곡했다.
멀리 살던 이모들이 나를 불렀다.
“사라야… 옷 갈아입고 엄마 보러 가자.”
어린 나이에도 직감적으로 알았다. 우리 엄마가 하늘나라로 갔구나.
그날 이모의 손바닥 온기, 내 양말 끝의 먼지까지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엄마가 보고 싶은 순간들은 늘 많았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 속에 컸지만, 엄마의 빈자리는 컸다.
아빠의 뒷모습이 유난히 지쳐 보이던 날,
초경을 하던 날,
지금의 남편이 된 남자친구를 소개하고 싶었던 날,
나의 결혼식 날과 오빠의 결혼식 날에도,
임신을 알게 된 순간에도 제일 먼저 엄마에게 말하고 싶었다.
입덧이 심하던 그 시기, “친정엄마 손맛에는 입덧이 없대”는 말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암 환자가 되던 그날도, 엄마가 너무 필요했다.
“엄마... 나 어떻게 하면 좋아? 하며 무너지고 싶었다.”
투병을 이어가는 지금도
가끔은 친정엄마 앞에서 아이가 되어 투정을 부려보고 싶다.
그래서 잘 안다.
엄마의 존재가 자식에게 어떤 것인지.
특히 딸과 엄마의 유대는, 설명 대신 침묵으로도 전해지는 무엇이라는 걸.
때로는 밥 한 숟가락, 이불 끝을 턱까지 끌어올려 주는 손길,
“잘했어” 한마디로도 다 되는 마음이라는 걸.
엄마도, 엄마의 엄마가 보고 싶은 순간이 있다.
잊고 살다 문득 가슴이 쿡쿡 쑤셔오는 날,
남편에게도, 친구에게도, 아빠와 오빠에게도 다 못 할 말들을
나도 엄마에게 전화해, 철없는 딸처럼 수다 떨고 싶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어.”
“나 좀 칭찬해 줘.”
“괜찮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해줘.”
그 간단한 문장들이 따끔따끔하게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가 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아이를 낳은 지금은 그 마음이 더 깊다.
나는 우리 딸이 필요로 하는 순간에 언제나 있어야 한다.
“엄마가 여기 있어”라는 문장을
손바닥 온도로 기억하게 해주고 싶다.
그게 내 엄마가 내게 남기고 간 숙제처럼 느껴진다.
꼭 그러고야 말 것이다.
매일 수유 시간에 딸의 손을 잡고 마음으로 말한다.
“딸, 엄마가 우리 딸 꼭 지켜줄게. 소소한 순간에도 함께할게.”
딸의 손가락이 내 엄지손가락을 꼭 쥐면,
나는 잠깐 엄마의 손을 기억해 낸다.
오늘의 일기는, 아무래도 눈물범벅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괜찮다.
눈물로 젖은 문장도, 언젠가 우리 딸에게는
“엄마가 여기 있었다”는 증거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