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이 뒤뜰을 덮고 있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쏟아지는 햇살에 신록이 반짝이던 오후의 절정, 고양이 룩희가 우두커니 뒤뜰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뜰로 난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햇빛이 룩희의 갈색 털에 점점이 스며들고 있었다. 녹색의 배경이 룩희의 몸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왠지 처연해 보이는 뒷모습.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새삼 룩희의 나이가 가늠됐다. 룩희도 이제 늙었구나.
내 안에서 서늘한 미풍이 불어왔다.
룩희는 장수 고양이다. 집고양이의 평균 수명을 12~15년으로 보는데, 룩희의 나이는 열아홉쯤 된다. 사람 나이로 치면 80~90대, 고령인 셈이다. 룩희는 노년을 지나고 있다.
룩희는 우리와 15년을 넘게 살았다. 평소에 내가 늙고 있다는 걸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듯이, 룩희가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나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룩희를 쓰다듬었을 때, 털에 윤기가 사라지고, 근육이 쪼그라든 사실을 마주하자, 룩희의 늙음을 실감했다. 언제부턴가 구내염이 심해져 침을 입에 달고 다닌다. 자주 오르던 캣타워도 이제 거의 오르지 않는다. 기운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확연히 느낀다.
룩희가 나이가 들면서 생긴 변화는 몸에만 있지 않다. 나와의 관계가 변했다. 나와 거리감을 유지하던 녀석이 언제부턴가 내 옆에 붙어 앉는다. 잘 때도 붙어 잔다. 나에게 기대는 횟수가 잦아졌다. 낯선 사람에게 보이던 사나움도 자취를 감췄다. 사람에게 곁을 잘 내주지 않던 아이였는데 나이가 들면 동글동글해진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물론 다른 고양이들에게 해코지하는 건 여전하지만, 횟수가 많이 줄었다.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고약한 심보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까.
또 다른 변화도 있다. 식탐이 늘었다. 시도 때도 없이 간식을 바란다. 나를 총총 따라다니며 간식을 내놓으라고 앵앵거린다. 심지어 내가 먹는 음식도 노린다. 식탁 위에 빵을 놓고 잠깐 한눈을 팔면 주방 바닥에 찢긴 빵 조각이 흩어져 있곤 한다.
내가 반려동물과 함께 산 지 20년이 가까워져 온다. 수명이 자기보다 짧은 종(種)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허망한 가정이긴 하지만, 별일이 없다면 반려동물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리라는 사실은 어떤 정념을 만들어낼까?
다른 종과 생을 같이 보내면, 생명의 순환을 수긍하게 된다. 노화와 질병. 나이 들면서 점점 떨어지는 기운. 룩희를 통해 나를 본다. 나 역시 노화하고 있다.
우리는 자주 잊곤 한다. 나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데 익숙하다. 그 분리를 통해 인간을 자연의 우위에 두곤 한다. 어쩌면 우리가 반려동물과 사는 이유는, 인간이 아직 자연과의 친연(親緣) 관계를 완전히 잃지 않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우리 집에 장수 고양이는 또 있다. 옥희라는 아이로 룩희보다 한 살가량 어리다. 우리 집 고양이들은 모두 장수 고양이가 될 터이다. 어느덧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역시 노령묘가 되어버린 지금의 어린 고양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노인과 고양이. 나는 고양이 풍경의 일부가 될 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