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뒤집어 생각해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코스모스로 시작한 이번 독서토론은 인간존재의 위치를 생각해보고 실천적 지식의 더 나은세상,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 가를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 밖에 할 수 없는 일들을 살펴보았다. 그 후 지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게되었고 이는 적절하게 쌓여가던 인간으로 묶이는 공통의 목표를 넘어선, 외로움을느끼게 해주었다,
그래서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 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하다. 단두대조차도
작가는 가벼움을 토마시와 사비나로 무거움을 테레자와 프란츠를 통해 보여준다. 토마시는 가벼움을 대변하는 인물이며 테레자를 만난 후에도 스스로 여자사냥이라고 부르는, 다른 이성과의 잠자리를 계속해나간다. 그런 토마시를 보고 무거움의 인물인 테레자는 받아들이지 못하며 괴로워한다. 토마시의 여자친구 중 하나인 사비나는 또 다른 가벼움의 인물이며 본인에게 주어진 무거움에서 벗어나기위해 애쓰는 인물이다. 그 무거움을 가진 그녀의 연인이였던 프란츠가 있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사랑은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들이다. 우리는 각자의 해석을 공유하며 위와 같은 피상적 인물구도(토마시, 사비나 = 가벼움/ 테레자, 토마시 = 무거움) 그 이면의 의미를 알아내기위해 고군분투 했으며 굉장히 다양한 해석들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작가의 의도는 위와 같은 인물설정이며 그것은 하고자 하는 말을 하기에 충분하다.
유사이래 모든 연애 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 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 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 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나는 마치 바오로산 정상에 선 테레자와 같이 안도감을 느꼈으며 동시에 외로웠다.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나'혼자만의 것이 아니며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인간 존재들'의 고민임을 속삭임을 다독이는
한편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는 타인, 세계를 보는 '나의 우주' 그 무의미의 끝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우주에서의 인간의 주소는 점, 먼지, 찰나, 무(無) 등 존재하는 모든 '가볍고 하찮고 작은 무의미한 어떤 것'을 뜻하는 단어들로 설명된다.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외로움을, 지구 또한 우주라는바다를 표류하는 어떤 것에 불과하기에 그에 의존해있는 우리존재의 운명이 [표류]라는 것을 알게된다.
[표류]라는 우리존재의 속성 탓에 "진리 찾기"는 인류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소명이 되었다. 거센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중이라면, 그 누구든 단단한 어떤것에 몸을 의지하기위해 발버둥 치는 것은 당연하니. 계절의 변화를 예견할 수 있게 된 고대인이 느낀 일종의 안도감이 그러한 것이다.
진리, 진리란 인간존재란 떠돌이 개가 지친 몸을 뉘이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며, 그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봐도 외부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다.
진리를 설명하는 삐까뻔쩍한 이론들은 많지만,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의 의미라면, 인간존재의 진리는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은 앞서말한 [표류]이며 '근원적 고독'이다.
네 인물 모두 자신의 세계에서만 존재했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들 (진리라 믿는 것들 신념 소명 지식 감정 등의 것들)의 육체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한 존재의 삶의 무게를 지탱하는 그것들의 힘은 스스로의 세계를 벗어나면 지극히 무력해진다.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받지 못한다.
작가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 다른 시각들을 보여주며 이 같은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가벼움, 무의미에 가까워진다.
나는 싱클레어이고 싶었다
나를 이끌어 주는 사람을 원했다
데미안같은 친구를 바랐고 에바부인 같은 여자를 동경했다
하지만 그런일은 우리모두가 경험했다시피 일어나지 않았다
싱클레어의 세계에서도 싱클레어는 그 자신밖에없다
하물며 여기는 다른 세계이니
우리가 살아내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어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누구도 온전히 자기자신이 되어본적이 없건만
누구나 자기자신이되려고 애쓴다
네이버 오디오 클립 [데미안 - 그러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한 부분이다.
무의미와 공허의 바다에서 의미를 찾아 떠나는 이에게 주어진 실낱같은 희망은 바로 이 순간의 가치이다.
살아내는 것의 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