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왜 正祖라 할까?》

- 바른 임금, 바른 정치 -

by jskim

임금의 묘호에 "바를 正" 字가 들어간 군주는 동아시아에서 조선의 22대 군주 정조가 유일하다. 그만큼 正字는 아무에게나 쓰는 글자가 아니다. 그런데 조선의 22대 군주 이산은 어떤 왕이었기에 이 바를 正 자를 올려서 정조가 되었을까.
병조판서 김조순이 제술한 정조대왕 시책문에 그 사유를 엿볼 수 있는 힌트가 있다.

"재임 시 훌륭한 업적들을 살펴보니, 동서남북 할 것 없이 모두 다 심복 할 만큼 이미 中和의 덕업을 쌓으셨으며 예악형정(禮樂刑政) 모두가 알맞게 작용하여 고금을 두고 그 至德이 이보다 더한 이가 없었습니다. 신하로서 천지와 같은 성상의 덕을 기림에 한 가지 덕으로만 칭하기는 어려워도 옥을 새기고 금을 새기며 영원히 못 잊을 아름다운 덕을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공의에 따라 감히 조심스레 이 말씀을 올리고 이내 신으로 하여금 옥책을 받들어 존시를 문성무열성인장효라 올리고 묘호를 正宗으로 올리게 하였으니 우러러 바라건대 성령께서는 굽어살펴주소서"

1800년 7월 6일 빈청에서 대행 대왕의 시호와 묘호를 지어 올렸는데 묘호를 正宗으로 하고 그 뜻은 "以正服之"라 하였다. 이정복지란 "올바름으로 감복시킴"이란 뜻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천명하며 생부의 죽음에 직접 관련이 있는 최소한의 인물들만 제거하고 노론 세력 전체를 척결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당시 노론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사실 국왕이 비록 절대권력을 쥐었다고 해도 통치는 예나 지금이나 勢의 싸움인지라 자기 勢가 어느 정도 자리 잡기 전까지는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다. 정조는 자파인 남인들을 꾸준히 등용하여 어느 정도 세의 균등히 이뤄진 후에야 자기 정치를 했다. 즉 때를 기다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론을 자극하지 않고 대우하였다. 주도권이 자기에게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정조는 노론들을 현창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사실 원수나 반대파를 적대시하지 않고 끼고 함께 정치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세손 시절부터 일기를 쓰면서 극강의 인내력을 감내한 정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조의 즉위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노론들 사이에서도 정조를 존중하는 무리들이 나타나게 되고 즉위 13년쯤
정조는 자신의 포부를 펼치게 되었다.

그 프로젝트가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신도시 화성을 축조하는 것이었다.
1794~1796년의 화성 축조는 이러한 정조의 왕권을 배경으로 단행한 회심의 결단이었던 것이다.

정조의 24년 재임 기간 중 가장 빛나는 봄날이 바로 화성의 건설이었다.

"正祖" 란 의미가 "동서남북 할 것 없이 모두가 심복 할 만큼 중화의 덕을 쌓고 모든 정치가 알맞게 작용하여 그 지덕이 극한에 이르러 반대파들도 심복케 한 위대한 군주"의 뜻이다.

흔히 조선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눌 때 전기는 세종을 모범으로 삼았고 후기는 정조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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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영정도 바른생활 사나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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